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기도 (문단 편집) === 경기의 사용 유례 === 경기가 기록된 사례는 [[신라]] 때가 최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수도 [[서라벌]] 중심지(경주 분지 가운데 지역) 동쪽은 대성군(大城郡), 서쪽은 상성군(商城郡)을 두었는데, 전국 다른 군은 밑에 [[현(행정구역)]]이 있는 것과 달리 이 대성군과 상성군 두 군은 특이하게 아래에 현 대신 정(停)이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상성군은 남기정(南畿停), 중기정(中畿停), 서기정(西畿停), 북기정(北畿停), 막야정(莫耶停) 5개의 정으로 되어있고, 대성군은 약장현(約章縣)과 동기정(東畿停)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기(畿) 자는 '도읍의 주변'이란 뜻으로, 바로 경기도 할 때의 기 자다. 지리적 위치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대성군과 상성군은 일종의 경기도, 내지는 수도권 역할에 해당하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정황상 여기까지는 보편적으로 왕경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라의 수도 서라벌 역시 이 정도 범위까지 포함된 개념을 말한다. 그리고 신라의 공식 행정구역명은 '동서남북+기'로 여러 개로 쪼개져 있었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여러 구절에 의하면 이를 통틀어 경기(京畿)라는 이름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다. 경기라는 이름을 별칭이 아닌 실제 행정구역 이름으로 사용된 사례는 [[고려]] 때가 최초다. 1062년, [[문종(고려)|문종]]이 [[서경(고려)|서경]][* 지금의 [[평안도]] [[평양시]].]에 부속도서 '경기사도(京畿四道)'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한국사 최초의 경기도다.[*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 기록.] 서경을 중심으로 경기도가 네 구역으로 나뉘어 감싼 것으로,[* 위의 신라 역시 수도(경) 주변의 '기'를 동서남북 4개로 나누었으므로 시스템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1390년, 고려 마지막 국왕인 [[공양왕]]은 수도 개성부[* 개성부는 원래 '개경(開京)'이라 불린 [[천자]]의 수도였다. 하지만 1308년, 원 간섭기 때 격하되어 개성부(開城府)가 되었다.]에 부속 행정구역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설치했다.[* 고려사 지리지 왕경 개성부 기록.] 이것은 중앙 수도에 경기도가 설치된 최초의 사례다.[* 서경은 [[황성]]이 세워지는 등 높은 대우를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도였다.] 신라나 고려의 경기는 당시의 수도였던 [[경주시]]나 [[개성시]] 주변 지역[* 고려 왕조의 경우 초기 한정으로 제2수도 격인 서경 일대도 포함]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조선]] 건국 후 [[공양왕]]의 전례를 따라 수도 [[한성부]]를 중심으로 교외 행정구역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를 설치했다가 다시 [[태종(조선)|태종]] 때 경기좌·우도를 경기라는 이름으로 통합한 것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경기도다. 한편 이렇게 경기를 만들면서 기존의 양광도에서 북쪽 반 쪽 정도가 잘려나갔는데, 양광도의 남은 반쪽을 기반으로 충청도가 만들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