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결호작전 (문단 편집) == 전략 == 결호작전의 핵심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상륙하는 미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이었다. 최대한의 출혈을 미군에 강요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최소한의 항복 조건을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항복 조건이 '[[천황]]제 유지', '조선을 포함한 개전 이전 식민지 유지', '일본 자체적인 전범 처벌 및 무장 해제' 등 천황제 정도를 제외하면 허무맹랑한 요구인지라 당장 패전을 앞두고 있는 나라에서 내밀 만한 조건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 천황제 유지에 대한 집착은 엄청나서, 실제 무조건 항복 선언 전까지 다른 조건들은 차례 차례 포기하면서도 물밑 외교 접촉에서 끝까지 요구한 게 천황제 유지였다. 그나마 천황제 유지는 간신히 성공했지만 이는 일본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 덕분이었다.] 결호작전은 철저하게 [[카미카제]]와 결사항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그마저도 준비가 여의치 않았다. 자살특공병기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한계에 부딪쳐서 제대로 된 타격을 가할 만큼의 자살병기를 배치조차 못했으며, [[https://ja.wikipedia.org/wiki/%E6%B1%BA%E5%8F%B7%E4%BD%9C%E6%88%A6|징병제를 강화하여 병력을 확보하였으나]] 결호작전에서 요구하는 500만의 병력도 서류상으로나 확보했지 실제로는 100만 명 내외에 불과했다. 더불어 [[국민의용대]]라는 이름으로 2800만 명의 민간인을 전장에 내보내려 한 계획도 있었다. 이것이 보통 이른바 [[1억 옥쇄]]라고 부르는 계획으로, 일본 본토의 전 국민과 식민지인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내 산화시키겠다는 [[http://www7a.biglobe.ne.jp/~mhvpip/0607HisannaSaigo.html|미친 계획이었다.]] 그 [[총알받이]]들에게 쥐어줄 무기라는 것들도 학교 책걸상을 잘라서 쇠파이프를 박아 만든 [[조총]]과 깡통에 화약이랑 쇳조각 넣고 도화선 심은 깡통폭탄에 조잡한 투석기와 활과 화살인 데다 그 급조 무기들조차 부족해서 상륙한 미군한테 칼 들고 덤비라고 '''미귀필살검 - 키리코미 도법(米鬼必殺剣-斬込刀法)'''이라는 간편하게 배워 당장 쓸 수 있게 일본도 기술 1개, 착검하지 않은 총검이나 부엌칼로 가능한 기술 1개, 접근법 1개로 구성된 국민의용대용 간단 검술[* 사사모리 준조(笹森順造)라는 민간인 검도사범이 창안한 도법으로 장검과 단검도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검도법은 비스듬히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두 차례 빠르게 벤 뒤 심장을 찌르는 세 단계의 구조였으며, 단검은 상대에게 뛰어들어 껴안고 심장을 찌르는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또한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구부려 앉아 접근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까지 발표되고, 여기에 쓸 날붙이조차 부족해서 [[죽창]]을 깎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http://nestofpnix.egloos.com/4861090|일본에는 죽창으로 사용할 대나무조차 모자랐다.]] 이런 [[개판 5분 전]]의 준비과정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당장 어떤 식으로 미군에 맞서냐는 것부터가 논의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논의는 했는데 이오지마, 오키나와와 같은 섬과 달리 후방의 공간이 있는 본토에서 어떤 전략을 쓰냐를 두고 극심한 의견 대립으로 인해서 결론이 도무지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오지마]], [[오키나와]]에서 효용성이 입증된 내륙에서의 지연전을 제창하는 부류가 있던 반면, 제국 본토에 한 발자국도 내딛게 해선 안 된다며 [[사이판]]에서 사장된 해안선 사수론이 나왔다. 그나마 수도 [[도쿄]]와 [[천황]]을 보호해야 하는 간토의 제36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의 방위태세는 최악이었다. 차라리 각지의 일본군을 불러올 수도 없는 일본 본토를 포기하고 아예 천황을 관동군으로 거동해서 저항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이 때는 [[소련]]이 소-일 중립조약을 파기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소련의 [[태평양 전쟁]]에 대한 입장은 중립이었다. 소련은 1945년 8월 8일에 조약을 깨고 [[만주]]로 [[만주 작전|진격]]했다.] 본토 결전을 하겠답시고 실시한 세 차례의 병비 계획도 항복 당일 기준으로는 택도 없었다. 신설한 54개 [[사단(군사)|사단]] 가운데 편제 정원을 갖춘 사단이 단 1개도 없었다. 그나마 1차 병비 때 창설된 사단은 편제라도 정상적이었지, 오키나와 전투의 긴박함 중에 이뤄진 3차 병비 때의 신설 사단은 축소[[편제]]로 이루어져 [[보병]][[연대(군대)|연대]] 3개로 전부에 [[포병]]이 없어서 [[투석기]]를 포병으로 쓰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그나마도 편제 인원의 반도 못 채웠고 [[소총]] 등 개인화기나 [[군복]] 등 피복류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러일전쟁 시기에조차 구식화되어서 후방부대용으로 돌려졌던 [[무라타 소총]]도 부족해서 위에처럼 책걸상 잘라서 개머리판 만들고 쇠파이프를 총신으로 쓰는 화승총이 이 부대들에 지급되던 판국이었다.] 기갑 세력의 열세도 심각했다. 미군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전차들을 상대로 성능이 입증된 신형 전차들을 [[몰락 작전]]에 다수 투입할 계획이었지만 일본은 구식 전차들도 수량이 부족하거나 있어도 연료가 없어 고정 토치카로 운용하였다. [[치하]]조차 없어서 [[치로]]로 기갑여단을 창설하고 있었고, 이들은 상륙군에 대한 기동타격을 목적으로 창설한 기갑여단들이었으나 연료 부족으로 전차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연료]]의 경우 남방 점령지에서의 운송도 차단된 지 오래여서 본토에서는 [[소나무]]에서 나오는 [[송근유]] 따위를 쓰고 있었다. 얼마나 막장인지 [[잠수함]]을 이용해 남방 점령지에서 소량의 원유라도 들고오는 것을 고민했을 정도. 물론 일본의 대표적인 원유 공급지인 보르네오 섬의 브루나이 일대가 45년 6월 [[오보에 작전]]으로 공격받아 빼앗겼기 때문에 잠수함을 이용한 원유 공급이라는 망상조차 제대로 실현할 수 없었다. 남은 건 보르네오 섬보다 거리가 더 먼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 유전이었는데 그나마 남은 이곳조차 세력을 회복한 영국 동양함대가 44년 말~45년 초에 걸친 항모 함재기 공습으로 타격을 준 상황이었다. 더구나 동시기 일본 본토의 정유공장들은 최우선적으로 폭격받고 있었다. 연료와 탄약의 재고도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무엇보다 병력에게 가장 필요한 [[식량]]조차 바닥 상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래로 적게 먹는 것이 건강을 위한 길이고 근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수신'은 먼저 식사를 억제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 무사도서 연마된 식생활의 몸가짐은 '무사는 먹지 않아도 유유히 이를 쑤신다.'거나 '배가 고파도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며 식욕을 억제하는 데서 구축되어 왔다.[* 이는 귀족 계층인 사무라이의 품위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격언으로, 굶을 만큼 상황이 힘들어도 그 긍지와 품위는 잃으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진짜 식욕을 억제한다느니 금식을 미덕으로 여긴다느니 같은 의미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 > - 부안구락부 1944년 6월호 중. 스기 야스사부로(1996~2002)[* 출처 : 하야카와 타다노리 저, 송태욱 역. <신국 일본의 어처구니없는 결전생활> (2019) 213p.] 사이판 함락 전인 1944년 6월부터 이런 글로 소식, 절식, 심지어 금식을 권유하는 프로파간다를 하는 판국이었다. ~~언젠 초식동물이라더니 아예 식물처럼 광합성을 하자고 하지~~사이판과 필리핀, 오키나와가 연이어 함락되고, 1945년 6월에는 미국 잠수함들이 [[동해]]까지 진출하면서 일본이 의지하는 대외 식량 공급처였던 조선과 만주의 식량 조달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당시 군산과 부산 등 조선의 주요 항구에는 쌀을 포함한 각종 식량이 창고가 터질 정도로 보관되어 있었는데, 일본으로 보내고 싶어도 배들이 출항을 못하다보니 이를 수송할 수가 없었다. 수입이 안 되면 국내 생산이라도 해야 하는데 일본 국내의 식량 생산력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중일전쟁 내내 징병을 한 데다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에서의 수입만을 믿고 농지 상당수를 군수 시설로 바꾼 판국이라 어느 정도 예건된 일이었다. 그나마 생산된 식량의 물류 이송 능력도 사실상 마비 상태였다. 철도 등 육상 수송 능력은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지 오래였고, 연안 해운의 경우 미군이 잔뜩 깔아 놓은 [[기뢰]]들로 일본 연안이 가득찬 상태여서 선박 운항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1945년 6월 9일, 만주와 중국을 시찰하고 돌아온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은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만주와 지나([[중국]])에 있는 병력은 다 합쳐도 미국의 8개 사단[* 병력의 단순 머릿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전투력을 말한다. 만주의 [[관동군]]+만주군 병력만 해도 70만이 넘는 대병력이었지만 장비와 훈련 수준 등을 감안하면 미군에 비해선 껍데기 수준이었다는 뜻이다.]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탄약 보유량은 근대적 대전투를 벌일 경우 1회분밖에 없습니다. 불과 사흘 후, [[천황]]의 특명을 받고 일본 본토의 병기창들과 [[요코스카]], [[구레]], [[사세보]], 마이즈루의 [[일본군 해군|해군]] 및 항공기지를 석 달 동안 시찰하고 돌아온 하세가와 기요시 [[일본군 해군|해군]] 대장도 이런 보고를 하게 된다. >[[신요 보트|자동차의 낡은 엔진을 떼다 붙여서 만든 작은 배]]가 특공병기라며 몇백 몇천씩 준비돼 있습니다. 이런 사태 자체가 벌써 걱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간단한 기계들을 조작하는 나이 어린 대원들은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훈련이 부족하다고밖에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동원계획 그 자체도 정말이지 엉성하기 그지없습니다. 계획은 치밀하지 못하며 중복된 것이 많습니다. 게다가 기동력은 공습이 올 때마다 악화되고 감퇴되어 전쟁 수행능력은 매일같이 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호작전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평할 수 있다. >이건 마치 12세 소녀에게 애를 낳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 > - 당시 대본영 기밀일지 기록 중 (출처: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일본 방위를 총괄하는 제2총군은 사령부가 [[히로시마]]에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s-5|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에 의해 제2총군은 수뇌부 및 사령부 기간 요원이 괴멸당했고, 총군 사령부에서 함께 훈련 중이던 2만여 예비 병력도 모조리 전멸당했다. 서일본 지역이 공격받을 때 이를 방어할 부대의 수뇌부가 무너진 것이다. 그나마 제2총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는 기적적으로 핵공격을 피했으나, 직후 만주를 시찰하러 갔다가 소련군에게 붙잡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