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결투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적으로 결투는 [[중세]]의 '''[[결투 재판]]''', 아니면 [[기독교]]화 이전 [[바이킹]] 사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정된다. 유럽의 [[가톨릭]] 교회는 중세부터 현대까지도 일관적으로 세속법과 별개로 결투와 결투 재판을 야만적인 풍습의 [[대죄]]로 보아 금지해왔다. 1215년의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결투에 참가한 사람과 협조자를 [[파문]]으로 단죄하였다. 16세기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결투는 파문 수준의 대죄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결투 재판을 행하는 지역이 많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3세기 이후부터는 [[성직자]]나 [[노인]]을 시작으로, 모든 사람이 대리인을 내세운 결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여성]]끼리의 결투도 있었다. 이때도 일반적으로 검과 총을 사용했지만, 단 한 건 [[블랙잭|모래를 채운 스타킹]]으로 결투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19세기에는 보통 [[총]] 특히 [[권총]]이 사용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냉병기보다 총이 다루기 쉬운 편인 만큼, 수련에 따른 실력차가 비교적 적어져서 공정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결투용 권총(duelling pistols)을 따로 가지고 다니기도 했는데, 실제로 쓸 목적보다는 자신이 상시 결투를 통해 명예를 지킬 의지가 있음을 통해 자신을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자신의 신사다움과 결투용 권총을 따로 소지할 만큼 재력이 됨을 과시하는 목적이 더 컸다. 고급스런 [[가방]]에 자신이 쓸 것과 결투 상대에게 빌려줄 것 2정을 세트로 갖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결투 특성상 [[머스킷]] 같은 장총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다만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영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검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근현대로 넘어가면서 결투 자체를 우스꽝스럽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영국]],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중반을 전후로 결투가 거의 사라졌고, 설령 하더라도 가볍게 취급했다. 입회자로 지목된 사람이 결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화포]]라든가, [[망치]], [[돼지]] 비료''' 같이 이상한 무기를 골라주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한 번 시비가 붙어 결투를 시작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무려 '''상한 돼지 창자로 만든 소시지'''로 결투를 할 뻔 했으며, 자신을 골리려는 결투임을 알자 그냥 결투에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결투의 경우, 참여하지 않아도 크게 비난이나 무시가 쏟아지진 않았다. 한편 교회에서는 자살을 죄악으로 치부했기에 [[타살을 빙자한 자살|이를 회피하면서 자기 목숨을 저버릴 수단]]으로 결투를 택하는 사람도 많았다. 근대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런 이유의 결투가 늘면서, 교회는 결투를 금지할 것을 각국 정부에 요청하였다. 특히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투는 자살 못지않은 악마적 죄악임을 확인하면서, 결투자는 물론 결투를 용인하는 군주나 영주, 결투 주선자와 방조자까지 [[파문]]하고, 결투로 사망한 사람을 교회 묘지에 안장하는 것조차 금지한다고 선언했고, 이는 결투 풍습이 근절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