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훤 (문단 편집) === 비판 === [[피로스 1세|탁월한 군사적 역량과]] [[항우|전술 그리고 결단력과는 달리]] '''장기적인 비전면에서는 왕건에 못 미쳤다'''. 완산주를 수도로 삼고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세웠지만, 견훤 자신이 신라 장군 출신이었기에 쟁패의 기준을 주로 통일신라 시대에 맞춘 흔적이 있다. [[청주시]], [[공주시]], [[홍성군]] 같은 경우 사실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백제 유민 의식이 분명히 있었으나,[* 금강 유역은 애초에 후기 백제의 중심지였으니 유민 의식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이다.] 견훤이 진격 방향을 하필 [[경상도]] 일대로 맞추는 바람에 이 일대는 궁예의 고구려 유민 의식을 초월한다는 캐치프레이즈에 넘어가 버렸다.[* 견훤이 [[경상북도]] [[문경시]] 출신의 신라 내지인(內地人)이었던 반면, 궁예는 어려서부터 청주에서 성장했고, 적어도 왕륭이 합류하기 전에는 주로 청주 근처 지역민들로 측근들을 꾸렸던 사람이었던 것 또한 간과하면 안 된다. 또한 바로 그 이유로 궁예가 멸망하자 해당 지역들은 고구려 유민 의식을 재천명한 왕건에게 충성할 이유를 잃었고, 이후 왕건 옹립 세력이 궁예 시절의 복수를 해대기 시작하자 물론 전원 후백제로 달려가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후삼국 시대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무려 200년이 지나 도래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역량을 주로 원신라 지역에 집중했는데, 그럼에도 견훤 본인의 연고지이자 아버지 [[아자개]]의 지배지였던 [[상주시]]가 자신이 아닌 고려에 붙은 건 아무래도 견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친 아자개와 화해하지 못했던 원인이 크다. 그리고 경순왕 옹립은 오히려 가장 큰 실수였다.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하는 산실이었던 경북 서남부를 내내 틀어쥐고 있었던 걸 보면 견훤 자체는 거병 전에도 신라군 내의 기대받는 유망주이자 명장이었던 건 분명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신라]] 쪽에서 내분이 벌어지는 순간 계속해서 원신라 지역을 잠식했던 역량 또한 칭찬해 줄 만하다. 그러나 경애왕 다음으로 가장 명분 있고 능력 있는 경순왕이 언제까지나 견훤의 통제를 따르며 감사해줄 거라 생각했던 건 크나큰 오판이었다. 견훤이 누가 보더라도 단기전에 집착한 걸 두고 견훤 자체에만 원인을 돌리긴 어렵다. 애초에 [[후백제]]가 경제력 측면에선 잠재성이 큰 옛 침미다례를 잃은 반면 고려가 옛 신라의 무열왕계 왕실이 거의 수백 년 동안 군사 지역으로 유지해왔던 [[추풍령]] 일대를 확보하면서 정예부대와 중요한 요새, 지정학적 유리성을 얻은 걸 보면, '''후백제가 처한 판세 자체가 장기전보다는 단기전에 대단히 유리하게 짜여 있던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견훤이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해서든 무마시키기 위해 그 포위망을 절묘하게 뚫고 서라벌을 습격해 들어간 것 자체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 백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그렇거니와 6세기 이후 내내 다툰 상대는 신라였지 고구려가 아니었고, 자연히 백제 부활과 의자왕의 복수를 천명한 견훤의 입장에서도 이들에게 태봉-고려와의 백제고토 쟁탈전보다는 신라 멸망이라는 선물을 안겨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 지역은 금강이라는 천연 방어선이 있는 탓에 북진을 시도한다 해도 요새를 두고 대치하는 지리한 지구전이 될 공산이 컸다. 고려 건국 직후 웅청주 일대의 후백제 귀부를 절대 '작은 이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장이 호남간선에서 한참 떨어진 선산 지역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라벌 습격 당시 저지른 만행들이 도가 지나쳤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경애왕을 살해한 것까지야 그래도 경애왕 하나 때문에 후백제가 7년 동안 골탕 먹은 바 있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경애왕의 애꿎은 왕비를 강간하고 서라벌에서 온갖 약탈을 자행한 건 현대인들의 눈으로 봐도 정말 용서가 안 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인근 호족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려 대세가 완벽히 고려로 넘어가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서라벌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에 충성하던 [[경상도]] 일대의 [[호족(한국사)|호족]]들마저 신라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잘 구슬려서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도 시도해야 했지만, 서라벌에서 이미 신나게 깽판친데다 비록 개박살나긴 했어도 구원군을 보내준 왕건과 대비되어 신라에 충성하던 호족들의 지지는 고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또다른 문제는 바로 [[경순왕]]. 경애왕까지의 신라의 왕은 일시적으로 다시 [[박(성씨)|박씨]]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는데, 경순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했던 정통성이 있는 [[김(성씨)|김씨]]였기 때문에, 신라 왕실을 와해시키기는커녕 도리어 가장 정통성이 있는 인물을 임금으로 만들어 신라 왕실의 정통성만 끌어 올려준 셈이 되었다. 물론 서라벌 강습 자체야 고려와 신라의 연합 전선을 끊기 위한 전술로서는 최적의 판단이었을지 모른다. 서라벌에서 처신만 나름 잘 했더라면 전략적으로도 좋은 판단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경애왕을 [[자살]]로 몰아넣을 필요도 없었고, 항복만 시켜서 고려와의 관계를 끊게 한 다음 물러나거나 아예 경애왕을 수도 완산으로 끌고 가서 인질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정통성이 매우 떨어지는 인물을, 그러니까 김씨 방계나 박씨 방계 내지 [[석(성씨)#s-2|석씨]] 같이, 원래 왕이 될 수 없는 계통의 인물을 옹립했어야 하는 건데, 하필이면 견훤이 경애왕 제거 후 신라의 새 군주로 세운 경순왕은 정통성이 가장 높은 김씨 직계 출신이었다. 그리고 후백제군이 서라벌 습격 이후 신라에서 철수하자, 경순왕은 한동안은 후백제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듣는 시늉은 하였지만, 기회가 되자 보란듯이 후백제와 [[국교단절]]을 해 버리고는 고려와의 친교 노선을 강화하여 멸망하는 그날까지 후백제와는 내내 으르렁대기만 하였다. 그러나 신라에 대한 견훤의 행보를 잘 살펴보면, 단순히 전략안이 부족했다고만 치부하기엔 후세인들이 보기에 뭔가 이상할 정도로 이미 [[경명왕]] 시절부터 신라 측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며 기민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과 김씨 족단 반역자들 사이의 오래된 커넥션이 있었을 수 있다는 말. 동서고금 이런 거래가 공짜로 이뤄지는 게 없는 이상, 김씨 족단이 왕으로 세우고 싶어하는 인물을 배제하면서 약속 위반을 하는 건 견훤 입장에선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수 있다. 애초에 경순왕의 외조부 헌강왕 자체가 견훤이 10대 후반 풋풋한 청소년 시절에 모셨던 신라왕이기도 했고. 사실 이 복잡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는 이미 위에서 제시되었다. 후백제는 기본적으로 다면전선을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라, 특히 서라벌 통제에 많은 인력과 자원을 쏟아부을 수 없는 상황인 탓이 컸다. 우선 서라벌 공격 자체가 철저한 기습 기동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보급이 불가능했고, 결국 지금까지의 진군에 소모된, 그리고 앞으로 고려군을 맞아 치를 결전에 필요한 물자는 서라벌 약탈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후백제군의 장렬한 훼이크 기동을 보면 애초부터 모든 건 현지보급으로 때운다는 것이 실제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약탈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학살만 통제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또한 경애왕을 인질로 삼거나, 정통성 없는 왕을 세워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 역시 기본 전제는 완산에서 서라벌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당장 국왕의 친정조차도 철저한 기습 끝에 간신히 성공시킨 상황이었고, 그 다음에는 고려의 대군을 맞아 싸워야 하는 공산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놓고 반백제 스탠스를 취했던 경애왕을 살려두기에는 고려군과 싸우는 사이 뒤에서 신라 박씨 왕족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내통설을 긍정할 경우) 김씨 족단을 배신하고 '정통성 없는 왕'을 강제로 옹립하는 것 역시 한창 공산에서 싸우는 와중에 무슨 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는 자폭행위였다. 내통설을 배제한다 해도 어쨌든 견훤의 입장에서는 동쪽 끝 서라벌을 통제하기 위해 어느 한 집단과는 확실한 손을 잡는 것이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줄타기보다는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견훤은 서라벌 습격과 공산 전투로 삼남 일대의 주도권을 잡은 후에도 안정적으로 세력권을 경영하지는 못했다. 당장 나주와 대야성을 군사력으로 탈환해야 했고, 신라 역시 지속적으로 침공해 경북 중북부 지역을 흡수하는 데 몇 년의 시간을 보내다가 그조차도 다 완수하지 못 한 채 [[고창 전투]]의 패배를 맞이했다.[* 심지어 대야성과 나주를 회복하고도 강주는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즉 후대인들이 보기에는 역사에 남을 악수라 할 만한 이 결정은 결국 서라벌 기습-공산 전투라는 외통수 상황에서 견훤이 그나마 고를 수 있는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다못해 대야성만 고려군에게 빼앗기지 않았어도 완산-금성 가도의 통제권은 확실해 후속병력에게 서라벌 통제를 맡길 수 있었을테니 견훤에게는 조금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후백제의 어정쩡한 시작과 위치였다. 아래에서 다시 '신라 장군'으로서 견훤의 정체성 문제를 거론하지만, 이런 권신으로써 견훤에게 가장 좋은 선택지는 그 옛날 동탁이 협천자하여 장안으로, 조조가 협천자하여 허창으로 천도했던 것처럼 아예 신라 조정을 통째로 들어서 완산으로 끌고 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견훤은 서라벌의 주민들을 대거 전주로 끌고 가기도 했지만 끝내 조정을 이동시키지는 못했다. 이미 '백제'라는 간판을 되살려 써먹은 탓이었다. 탁조는 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내부적으로도 한실의 신하임을 강경하게 규정했지만, 후백제는 스스로 신라와 동등한 국가임을 주장한데다가 심지어 신라가 '복수'의 대상이었으므로 신라 조정을 이동시킴은 그 자체로 신라의 멸망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당장 신라를 완전히 병탄할 여력은 없는 상황에서 견훤은 서라벌의 신라 조정을 유지시켜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러자면 남아있는 신라 조정이 자력으로 자신에게 대항할 가능성, 더불어 자신이 떠난 후 신라 조정이 어떠한 사달로 인해 자멸할 가능성을 모두 차단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를테면 세상일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경애왕을 죽여야만 한다 해도 그 방식을 달리했다면 상황을 조금은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경애왕에게 모욕을 주며 살해(혹은 자살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그럴싸한 정치적 명분, 예를 들어 박씨 왕가의 세습을 규탄하며 김씨 왕가의 '복귀'를 처음부터 출병의 명분으로 주장하고, 경애왕의 주살 역시 김씨 족단과 같은 신라인들 스스로의 손에 맡기며 확실한 공범으로 삼는 방향으로. 하지만 일단 서라벌 공격 자체가 매우 기습적이라 이런 정치적 구호를 내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신라에 대한 복수'를 건국 명분으로 내건 외지인 국왕 견훤으로써는 그런 유연함보다는 구백제계들을 한방에 사로잡을 수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즉 후대의 시선에서 보기에는 굳이 서라벌을 불태울 필요가 있느냐 싶겠지만, 반대로 백제인들이 보기에는 '''"저 상주 산골 출신이 백제 왕족이라고 구라치는 거 흐린눈 하고 왕이라고 모셨더니 복수는 개뿔 신라 왕은 살려주고 서라벌은 곱게 내버려둬?"'''라는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필 백제는 [[개로왕|국왕이 외적에게]] [[성왕|살해당한 사례가]] 3국 중 가장 많았고, 특히 왕건이 태봉을 뒤엎고 고려를 건국한 920년대 당시에는 웅주와 청주 일대 많은 구백제계가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를 택한 상황이니 더더욱. 이런 퍼포먼스는 아주 헛된 것은 아니라서 그가 신검에게 쫓겨나고서도 민심은 여전히 견훤에게 우호적이었고 이는 신검의 늦은 즉위와 일리천 전투에서 백제군의 무더기 투항으로 입증되었다.] 게다가 이 때의 견훤은 이미 환갑이 넘었다. 오로지 개인의 카리스마만으로 무연고지의 호족들을 규합해 국가를 세운 견훤으로써는 반드시 자신의 대에서 신라 병합을 완수하여 후대에 물려줄 필요가 있었는데, 딱 10살 젊은 왕건과 달리 신라를 장기적으로 흡수할 복안을 가지고 온건하게 대응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최대한 힘의 우위로 찍어누르는 길을 포기하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 서라벌 습격-공산 전투 당시의 상황을 보면 계획 이상의 군사적 성과, 그 성과에 반비례해 추락한 민심, 고령으로 조급한 상황 등등 여러모로 [[적벽대전]]의 조조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물론 견훤에게도 삼한통일을 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바로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가 몰락했던 즈음인데 왕조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 속에서 친궁예파 세력의 이탈이 끝없이 벌어졌다.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건의 목에 칼을 겨눈 [[환선길]],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흔암]], 서원경 세력의 [[임춘길]], 명주의 [[왕순식|김순식]] 등이 모두 이 즈음 왕건에게 반기를 들었던 세력들이었다. [[철원군]]에서는 끝없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지방에서는 성주들이 후백제에게 투항하는 등 왕건의 쿠데타 직후 고려는 점차 공중분해되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절호의 호기였던 셈.[* 애당초 고려는 건국 4일만에 반역자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 반면 견훤은 즉위한지 20년 가까이 되었기에 왕건보다 기반은 굳건한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견훤이 '왕위를 찬탈한 역적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북벌군을 일으켜 고려를 공격했다면 승산이 얼마나 되었을까? 하지만 견훤은 이런 엄청난 호기를 흘려보내면서 도리어 왕건에게 즉위 축하 사절단을 보내버렸고 외부에서의 지원이 없어 왕건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왕건의 통치 기반만 안정화하는데 이바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이 때가 견훤이 왕건을 공격할만한 찬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환선길은 어설프게 쿠데타를 일으켜 후백제가 연계할 것도 없었고, 이흔암은 정사의 기록에서조차 쿠데타 시도가 있었는지도 애매해 예방 숙청된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며, 임춘길은 변경에서 반란을 시도했다가 세력 전체가 일거에 제거되었다. 김순식은 후백제로서는 먼 거리라 애초에 시도조차도 불가능했다. 후백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918년 8월로 환선길과 이흔암이 숙청된 시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공산이 크다. 고려는 이런 문제들을 덮자마자 혁명 3개월만에 '''[[아자개]]의 귀부'''라는 초특급 이벤트를 일으켜 왕건의 지배 체제가 공고함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무엇보다 궁예는 미륵부처를 자칭하며 대놓고 불교계에서 숙청을 벌였고 [[도선대사]]를 내세운 왕건 정권은 당대 한반도 불교계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당시 고려의 수도는 내륙인 철원이었고, 후백제는 다 망해가는 신라의 대야성조차 뚫지 못한 채 허송세월만 보낸 게 2년 전이었다. 즉, 후백제도 내부 정비의 시간이 필요해 왕건에게 유화책을 썼던 것이지, 반란이 몇 건 있었다고 해서 후백제의 공세가 필승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또 한가지 견훤의 1차 목표는 바로 신라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우주방어하던 [[대야성]]이었다. 때문에 대야성에서 5차례나 전투가 벌어진 것인데, 왕건이 고려의 주인이 된 918년에서 2년 뒤인 920년 3차 대야성 전투에서 마침내 후백제가 대야성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진례성(오늘날의 [[창원시]])까지 진격했는데, 신라가 고려에 구원 요청을 하여 왕건이 군사를 움직이자 더는 진격하지 않고 물러났지만, 그래도 후백제의 오랜 숙원이던 대야성을 마침내 점령한 것이다. 후백제는 신라와 전쟁할 때도 대 고려 전선에 상당수 수비 병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10,000명의 대군을 투입했다고 특별히 기록된 걸로 보아서 고려와 화친을 맺고, 대 고려 전선의 병력 일부도 대야성에 보내 총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왕건이 병력을 보내자 무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다. 이를 볼 때 견훤은 고려의 내란 당시 이 혼란을 이용해 고려에 침공하는 것과 신라에 침공하는 것을 저울질 하다가 일단 왕건과는 화친하는 척 하고, 숙원이던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듯 하다. 아직 국내가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던 왕건으로서는 견훤과의 화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으니, 후백제에 먼저 선공을 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견훤은 고려와의 화친을 이용해 대야성을 점령함으로서 충분히 이득을 본 것'''이다. 이 부분을 기록한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고 말하듯이, 애초에 견훤의 화친은 진짜로 고려와 화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비교적 빠르게 안정된 고려를 치는 도박에 걸기보다 대야성이라는 확실한 이득을 취했으니, 이걸 실책이라 해야 할지는 의문이다. 잊지 말아야 하는 건 [[대야성]]은 그저 그런 신라의 여러 성들 중 하나가 아니라 이게 뚫리면 자국의 수도인 [[서라벌]]까지 위기일발의 상황에 놓일 수 있는 수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이다. 거기다 기왕에 고려와 신라 양쪽 중 하나를 고르자면 당장 오늘 내일하는 신라가 만만찮아 보이는 고려보다 더 좋은 선택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가 차지한 지역보다 신라가 차지한 지역이 더 꿀땅이라서 조선시대에 이른바 삼남이라 부른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세 곳은 거의 다 후백제와 신라가 나눠먹고 있었다. 즉, 견훤이 신라를 먹으면 이 삼남을 모두 먹다시피 한지라 고려에 비해 그리 꿇리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이후에 견훤은 서라벌에 쳐들어옴으로서 신라가 자기 나라 하나 건사하기도 어렵다는 걸 증명하던 판국이었으니 차라리 대야성부터 먼저 먹고 나아가 신라 전체까지 통째로 먹을 발판을 마련하는 게 고려와 싸우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을만 하다. 여기에 고려는 [[나주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진짜 정면으로 붙으면 최악의 경우엔 남북에서 고려가 공격해올 수도 있는 양면전선이라는 불리한 지경에 있었다. 여기서 현대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은, 당시는 통일신라가 300년 가까이 한반도 중남부에 군림하고 있던 시기라는 것이다. 즉 국토 전체에 걸쳐 경주를 중심으로 구축된 인프라가 건재했고 신생국가들인 고려와 후백제 모두 이 기반 위에서 국가전략을 채택해야 했다. 간선도로는 경주를 시종점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 있었기 때문에 후백제는 무주에서 전주로 북진하는 과정에서 간선도로를 아예 새로 닦다시피 해야했고 그나마 큰 돈 안 들이고 진군할 수 있는 경로가 바로 경주행이었다. 그러므로 건국 직후부터 바로 경주행의 관문인 대야성 공략을 시도했고, 이게 좌절된 이후로는 역시 신라 방면으로 내달리는 태봉-고려를 저지하기 위해[* 고려 건국을 전후해서 이 남진의 목적은 각각 신라 멸망(태봉)과 신라와의 연합전선(고려)으로 180도 달랐다. 하여간 태봉-고려 역시 언제나 목표는 경주였지 후백제가 아니었다.] 한주로와 삭주로의 핵심 경유지인 상주 지역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것이다. 즉 후백제에게 고려를 멸망시키는 북진은 애초에 당면 과제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북진을 하려면 상주를 확보하고 주 진격로가 될 한주로를 장악해야 하는데 그 상주는 당장 아버지인 아자개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또 조령-죽령 일대의 방어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웅청주야 백제 유민의식이 강한 지역이라 궁예의 몰락과 함께 후백제를 택했지만 조령의 방어를 맡을 중원경(충주)은 삼국시대의 쟁탈지였기 때문에 딱히 어딘가에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정치적 이득을 따져본다면 다름아닌 왕건의 처가 지역이었다. 웅청주의 귀부와 반란을 가지고 고려의 공중분해니 통일의 호기니 하는 말은 현대인의 상식으로 가볍게 의문을 가질 수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문제라면 후백제는 오히려 이 시점엔 등 뒤의 나주를 빼앗겼고 후에는 강주를 거쳐 대야성까지 함락당한다. 그럼에도 후백제는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서라벌 기습]]이라는 뒤집기를 성공시켰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있어서 신료 및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1차 왕자의 난|장남 신검이 아닌 금강에게 물려주려]] [[원소(삼국지)|했던 것]]'''도 치명타로 작용해버렸다. 차라리 제2대 왕은 [[견신검]]이, 제3대 왕은 [[견금강]]이 왕위를 승계받는 형제 세습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아예 주변에서 반항을 못하게 찍어눌러놨다면 또 모를까.[* 전자는 이전 [[중국]]의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때 오나라의 [[손책]]과 [[손권]], 후대 [[네팔]]의 [[비렌드라]]와 [[갸넨드라]], 벨기에의 보두앵과 알베르2세의 사례가 있고, 후자는 [[조선]]의 [[태종(조선)|태종]]이 행해서 삼남 [[세종(조선)|세종]]이 물려받기 쉽게 만들었다. 단, 중요한 사실은 손책은 예기치 못한 암살 사건으로 어쩔 수 없이 동생 손권에게 넘겨준 것이기에 만일 손책이 장수했다면 손권은 자리를 아예 물려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갸넨드라 역시 2001년에 지방 도시를 시찰하던 도중 수도 [[카트만두]]에서 [[네팔 왕실 참극|당시 조카였던 디펜드라 왕세자가 형 비렌드라 국왕을 쏴 죽이고, 본인도 총기 자살하는 참변]]을 저지르며 왕실에 큰 공백이 생겨 왕위를 이어 받은 경우였기에 만약 디펜드라가 비렌드라를 살해하고, 자살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본인의 선택이 결국 마지막 지지 세력까지 홀라당 날려먹은 꼴이 되었다. 결국 본인은 아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채 처참히 유폐당하는 속된말로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고, 이후 후삼국 통일이라는 대업은 제3자이자 라이벌인 왕건이 이루고 말았다.[* 중국 [[남북조시대]]와 비교하는 견해가 있는데, 견훤은 [[부견]]과는 공통점이 전혀 없고 오히려 [[고환(남북조시대)|고환]]과 비슷하다. 고환은 북위의 알짜배기 지역을 제패했고 북위 중앙정부와도 인연이 깊었으나, 북위 황가에 대한 탄압은 고환의 고씨 일가가 그 시대 기준으로도 비상식적으로 극악했다. 우연히도 [[태조(고려)|왕건]]은 [[문제(수)|수문제]]라기보다는 [[우문태]]와 더 비슷하다. 우문태가 차지한 서위 일대는 북위 입장에선 변경지였고, 우문태 자체도 북위 조정에서 받은 혜택은 거의 없었으나, 북위 황가에 대한 대접은 그럭저럭 양호한 편이었다. 왕건의 패서 지역도 통일신라 입장에선 변경지였으나, 그랬기에 통제가 느슨한 편이었고 신라 왕가에 대해선 보다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견훤 자체는 신라 혈통 신라 장수, 그것도 보통 장수가 아니라 신라 왕실 근위대 혹은 위에서도 상술되는 신라 수도 방어사단 육기정 부대의 장교가 기원이었고, 백제왕이 된 것도 사실 그에게 있어선 차선책이었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다. 때문에 초반에 구태여 긴 관직을 유례없이 늘여 쓰고 백제 왕이란 칭호는 꽤 오래 참은 건, 신라 왕실에 보내는 무언의 시위였다는 것. 당시 당나라에서는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을 거치면서 각지에서 지방 절도사를 자칭하며 심지어 중앙정부의 공인까지 받아내는 세력들이 일어났고, 멀리 가면 서로마 제국 말기에 야만족 왕들이 중앙 조정을 압박해서 관직을 따내는 시도가 있었는데, 견훤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신라는 체제의 한계도 있었고 '''신라 왕실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충성해야 할 견훤이 반란군짓하는 게 얄미웠던지''' 이런 행동을 받아주지 않았으며, 때문에 견훤이 선택한 차선책이 백제 부활이었다. 다만 견훤은 후세인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라 서면 도통'이란 칭호만큼은 백제 왕이 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자처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심이 백제 왕보다는 당당한 신라 대장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견훤이 불필요하게 서라벌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옛 백제 영토보다는 신라 영역에 관심이 깊었던 것에선, '''그가 백제 왕으로서의 역할에 나름 충실했음에도 내면 한 곳에선 여전히 신라 장수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음'''이 분명히 보인다. 이는 혈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 자체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아예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던 궁예나, 나면서부터 [[고구려]] 유민 의식이 강한데다 신라 왕실한테 별로 피해도 혜택도 그닥 본 적 없어 냉정하게 제3자 입장에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왕건과는 크게 비교되는 측면이다. 여담이지만 결국 견훤은 소원 성취는 한 셈이었다.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옹립한 시점의 그는 적어도 서라벌 자체의 실질적인 주인장이나 마찬가지였고, 신라 왕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최고권력자가 되어 있었으니... 이는 백제 왕이라기보다는 통일신라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신]]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실 후기신라의 몰락과 후삼국의 개막의 근원에는 신라의 지독한 골품제, 특히 진골 절대우위의 독주체제와 이에 불만을 품은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역시 지방 호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견훤도 이러한 신라 중앙조정과 상층부를 독점하는 진골 귀족세력에 대한 반감, 그와 동시에 그 한계를 깨부수고 신라라는 체제 안에서 정상에 서보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즉 견훤이 서남해안에서 거병한 것 자체가 정석적인 루트로는 신라 중앙군에서 출세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택한 차선책에 가까우며, 온 서라벌을 초토화시키고 귀족들을 압송해가면서도 끝내 신라라는 국가의 외형만은 남겨두었던 것 역시 당시의 견훤 본인으로서는 젊은 시절 절감했던 신분의 한계에 대한 보복으로의 완결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타고난 정체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이러한 행태와 한계는 삼한 재통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삼국사기]]》 열전은 바로 <견훤 열전>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고려의 통일을 진정한 통일로 보는 김부식의 시각 때문이라고... [[김부식]]은 사론에서 궁예와 견훤을 함께 평하고 있는데, "옛적 중국의 [[항우]]나 [[이밀]]은 뛰어난 재주를 가져도 결국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했는데, 궁예나 견훤 같은 흉한들이 어찌 우리 태조께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은 모두 우리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모아준 이들일 뿐이다"라는 평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사서를 편찬하는 김부식의 입장을 고려하며 그냥 알아만 두자.[* 개인 저서라도 왕조국가에서 현 왕조에 대한 충심을 나태내야할 판인데, 삼국사기는 아무리 저자가 김부식이라도 엄연히 관찬 역사서이다. 왕조 국가가 전대 역사서를 편찬할 때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므로, 삼국사기에서 궁예와 견훤의 평도 결국 왕건을 돋보이게 하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