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훤 (문단 편집) === 긍정 === >그 당시[* 해당 기록은 동진대사 경보가 전주 임피군으로 귀국한 천우 18년(921년) 시점이다.] 주존(州尊)인 '''도통태부(都統太傅) 견훤은 군대를 통솔하며 만민을 보호하는 방벽의 언성이었다.''' '''태부는 본디 선행을 쌓아 장군의 집안에 태어났고''' 바야흐로 웅대한 뜻을 펴기 시작하였다. >----- >옥룡사동진대사비(玉龍寺洞眞大師碑)[* 전남 광양에 있는 옥룡사에 세워진 나말여초의 선승 동진대사 경보(860~974)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다. 비석의 실물은 남아있지 않고 비문만 전하고 있는데, 비문은 958년 고려 광종 때의 학사 김정언(金廷彦)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경보는 또한 도선의 제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해당 비문은 왕건과 대적했던 견훤에 대해 '도적 수괴' 정도로 취급하는 《고려사》 및 후대의 기록들에 비하면 그나마 견훤에 대해 긍정적인 언급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견훤은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세웠던 전적도 있었고, 1,000년을 이어온 신라의 왕까지 바꿀 정도로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패왕]]이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s-1]] 사령관에 [[공산 전투]]에서 [[태조(고려)|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적 면모도 갖추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별다른 빽도 없이 경주로 들어가서 본인의 무력적 소양만으로 비장에 오른 것만 봐도 그 실력만큼은 확실하다. 그것도 [[부정부패]]가 하늘을 찔렀던 신라 말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한 것이다.[* 육군본부 《한국군사사》에 따르면 신라의 근위부대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골품제|골품]]의 영향력이 배제된 추풍령 상주 같은 왕실 직할령에서 자원입대를 받았기 때문에 상주 출신이라는 게 그가 혼란스런 신라 말기에 출세하는데 플러스 요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순수하게 육상에서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왕건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으며 [[궁예]], [[유금필]]과 함께 [[후삼국 시대]] 최고의 [[명장]]이다. 소수의 군사로 남해안을 휩쓸고 전라도 지역을 장악한 것도 탁월한 군사적 업적이라 볼 수 있지만, 2차례의 조물성 전투에서도 왕건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특히 걸작이라 할만한 것은 '''[[서라벌 기습]]'''과 '''[[공산 전투]]'''다. 신라와 고려의 합작에 의해 전략적으로 상주 지방으로의 진출이 봉쇄당하고, 북쪽의 고려와 동쪽의 신라, 남쪽의 대야성에 주둔한 김락의 군세에 협공당할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도, 고려군의 약점을 꿰뚫어보고는 신속한 [[기동전]]으로 고려군 전선의 간극을 치고들어가 서라벌을 유린하고,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는 왕건을[* 이때 왕건은 위기에 빠진 서라벌을 구한다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위해 일부러 느긋하게 왔고 이것이 큰 패착이 되었다.] 요격해 그야말로 박살을 내버렸다. 이때 왕건은 거의 한 달간 행방불명이 되기까지 했다. 고창 전투에서도 호족 세력들이 왕건의 편을 들기 전까지는 후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해전에서는 왕건을 제압하기가 어려워 나주를 빼앗겼지만,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나주를 탈환하고, 예성강을 기습해 수도 개경을 공격하는 등 고려에 큰 한 방을 먹이기까지 한다. 사실 견훤은 아주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아버지 [[아자개]]가 [[호족(한국사)|호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그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말단 군인으로 시작해 불과 몇 년만에 중앙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의 자리에 올랐으며,[*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 견훤 이전에 지방 출신으로 중앙 조정에서 직접 벼슬을 제수받은 사례는 역사상 [[장보고]]밖엔 없었다. 더구나 당시 [[골품제]]라는 신분적 질서가 신라 전체를 강하게 옭아매던 시기였다. 장보고가 당나라에서 공을 세워 돌아온 뒤 세력을 키워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장악한 뒤에도 중앙의 진골 귀족들에게 지방 출신이라고 천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견훤이 비장 벼슬을 얻은 것 역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지방에서 세력을 일으키게 된 계기도 서남해로 발령받아 그 곳에서 스스로 병사를 모으고 힘을 길러 해적과 해상 호족들을 진압하면서부터였으니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고도 한다. 그 결과,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견신검|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견금강|금강]]을 태자로 삼으려했다가 뒷통수를 맞았다는 평도 있다. 재능도 상당했지만 그 끈질긴 [[근성]]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무려 67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해 왕건과 맞붙어 수차례 승리한 바 있을 정도였으며, 그 오기와 끈기 또한 대단하여 신라로 통하는 요충지인 대야성의 경우에는 20여년간이나 끈질기게 공을 들인 끝에 점령하였고, 왕건이 궁예의 신하를 지낼 적에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빼앗아버렸던 나주를 다시 십수년의 공을 들여가며 키운 해군으로 도로 빼앗았으며, 그 여세를 몰아 개경까지 진격하여 고려 왕궁을 공격했으니, 그야말로 '''[[근성]]의 화신'''이라 불릴 만하다. 육전과 해전 양면에서 고려군을 잘근 잘근 씹어드셨다. 또한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견훤의 과격한 행보와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으로 대체로 호방한 성격 탓에 정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유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호족(한국사)|호족]]들을 휘어잡는 솜씨는 호족들의 지역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천도와 개호를 반복하고 [[미륵]] 신앙을 이용해 [[공포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여 자멸한 궁예를 크게 능가했으며, 나주 지역의 지지는 얻는 데 실패했다는 점을 고려해도, 사성 정책과 결혼 동맹으로 철저한 [[왕권]] 강화보다 호족간 [[군신#s-2]](君臣)의 [[동맹]]을 맺는 차원에 머문 왕건과 견줄만 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던 [[궁예]]가 결국 [[중앙집권제|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호족(한국사)|호족]]의 대표격인 [[태조(고려)|왕건]]의 손에 죽었고, [[광종(고려)|광종]] 이전의 초창기 고려가 호족 연합적 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당장 일개 군졸들이 견훤이 고려에 투항해 자신들 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사기를 잃고 고려군에 많은 수가 항복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대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예와 달리 이렇다할 [[공포정치]]는 펼치지 않았으나, 정작 후계 문제를 원활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고창 전투]]의 패배로 비극을 당하게된다. 그래서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재평가를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