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견훤 (문단 편집) == 개요 == [youtube(VB-r_rGgNxY)] [[신라]] 말기의 [[군인]]이자 [[후백제]]의 [[창업군주]]. '''한국사의 [[피로스 1세|피로스]]'''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뛰어난 [[명장]]이었으며 '''[[후삼국시대]]의 문을 열고 스스로 닫은 걸출한 군주였다.''' 후삼국시대는 그가 후백제를 세우면서 시작되었고, 그가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비로소 끝났다. [[창업군주]]로서 자신이 건국한 나라를 스스로 무너뜨렸으니 [[한국사]], 나아가 전세계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군웅은 찾기 힘들다.[* 건국하자마자 무너져 단명한 왕조나 창업군주가 후계자와 대립각을 세운 국가는 역사적으로 많다. 다만 창업군주가 타국으로 망명한 경우부터는 찾기 힘들어지며, 아예 최전선에 직접 출전하여 자신이 세운 나라를 멸망시킨 사례는 '''견훤이 유일'''하다.] 892년 [[후백제|백제]](百濟)[*B 후백제는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사서에서 붙인 이름이고, 견훤은 백제라고 칭하였다.] 왕이 되었으나 공공연히 왕을 자칭하지는 못하고 자서(自署)[* 자필 서명.]할 때 신라서면도통(新羅西面都統) 지휘·병마·제치(指揮兵馬制置) 지절도독(持節都督) 전·무·공등주군사(全武公等州軍事) 행전주자사(行全州刺史) 겸(兼) 어사중승(御史中丞) 상주국(上柱國) 한남군(漢南郡) 개국공(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 삼국사기 권50 진훤열전(甄萱列傳)의 기록이다.]라고 하였고,[[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50r_0030_0050&position=-1&position=-1|#]] 900년 [[후백제|백제]](百濟)[*B] [[군주|왕]]을 칭하고 935년 음력 3월까지 재위하였다.[[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g&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g_050r_0030_0070&position=-1|#]] 견훤은 본래 [[남북국시대]] 신라의 장군으로 신라 서남 해안[* [[전라남도]]]에서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으나 889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거병하여 892년에 무진주[*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왕을 칭했는데 이때 공식적인 건국은 아니고 일단은 왕이면서도 신라 왕의 신하를 자칭하는 애매한 스탠스를 취하다 900년에 비로소 완산주[* 完山州, 지금의 [[전주시]]]에 도읍하여 200여년 전에 멸망한 [[백제]]의 부활을 선포했다. 이때 견훤이 재건한 백제는 먼저 있었던 부여씨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후백제로 부른다. [[신라]], [[궁예]], [[왕건]] 등과 후삼국의 패권을 놓고 수십 년간 다투었으나 935년(태조 18) 음력 3월에 적장자인 [[신검(후백제)|신검]]이 일으킨 정변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고 대리 집정을 하던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단, 이게 견훤의 포용력 부족이란 얘기는 대단한 단견이다. 청주, 공주, 나주만 백제 유민이 사는 지방은 아니었고, 애초에 청주 출신 궁예가 고구려 정체성 초월을 외치며 청주, 공주 일대 호족들에게 크게 대우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궁예가 쓰러지자 해당 지역들이 바로 후백제에게 달려간 걸 보면 이걸 갖고 견훤의 포용력 운운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나주 같은 경우는 광주와의 오랜 대결의식이 이유였는데 실은 이 나주마저도 견훤의 후백제를 당해낼 순 없었다. 이렇게 따지면, 그 포용력 좋다는 왕건이 신라의 여러 명군이 통일신라 정예군을 양성한 경북 서남부는 끝내 포섭하지 못했던 건 어떻게 볼 것인가? 경남 일대는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가 쥐고 있었는데, 후백제가 내내 살상만 저지르고 '포용'은 하지 않았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견훤이 지나치게 경상도 일대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 옛 백제 일대 포섭이 미뤄진 건 사실이었으나, 군사적으로 봤을 때 그 지역들은 다소 가치가 떨어짐은 부인할 수 없다. 견훤의 대전략은 조령과 추풍령 전체를 장악하여 옛 나제동맹이 고려를 막았던 바로 그 철벽 방어선을 구축함이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고려사 DB 검색 서비스 미비로 운주로 검색하면 920년대 후반 기록이 먼저 검색에 걸리지만, 고려사 918년조 기록을 찬찬히 잘 보면 지금의 공주, 청주 일대가 태봉 붕괴 전후로 후백제에게 넘어간 원사료가 나온다.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types=r#detail-kingYear/kr_001r_0020_0030_0070/1/0918/08 (계해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개의 주현(州縣)이 모반하여 백제(百濟, 후백제)에 붙자 전 시중(侍中)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 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 知牙州諸軍事)로 임명하였다.) 해당 부분은 국학자료연구원 나말여초정치제도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기도 함. 아울러 김갑동 저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충청남도문화연구원 편저 백제사 시리즈 백제유민편 또한 참조] 실권한 견훤은 금산사에 연금되었다가 과거에 숙적이었던 고려 [[태조(고려)|태조]]에게 귀순하였고, 10만이 넘는 고려군의 선봉으로 후백제를 총공격하였다. 936년(태조 19) 음력 ~~9월 8일~~[* 원문에는 '''가을 9월(秋九月) 갑오(甲午)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음력) 9월에는 갑오일이 없으며, '''(음력) 8월 9일(갑오일)'''을 견훤의 사망일인 '''(음력) 9월 8일(계해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번역문에서는 음력 날짜는 원문대로 '''9월 8일(계해일)'''로 그대로 두었고, 추가로 병기하는 양력 날짜는 음력 8월 9일에 해당하는 '''9월 26일(갑오일)'''로 해놓았다. 덧붙여 가을 9월도 오기가 되어 '''가을 8월(秋八月)'''로 고쳐야 옳다. 참고로 고려사에서는 음력을 사용하므로 1~3월은 봄, 4~6월은 여름, 7~9월은 가을, 10~12월은 겨울로 표기하고 있다. 예컨대 봄 3월(春三月), 겨울 10월(冬十月) 같은 식이다.]에 후백제는 대패하여 [[견신검|신검]]과 그 신하들이 항복하였고, 견훤은 신검이 처형되지 않고 용서받자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음력 9월 8일(계해일)[*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후백제가 고려에 항복한 날은 '''음력 8월 9일(갑오일)'''로 추정된다. 만약 원문처럼 항복일인 '''갑오일'''을 '''음력 9월 8일(계해일)'''로 이해해 버리면, 견훤이 등창이 생겨 수일만에 사망했다는 기사와 모순이 생겨버린다. 항복일을 '''음력 8월 9일(갑오일)'''로 바르게 수정할 경우, 신검 등 후백제 인사들에 대한 처리에 20일 정도 소요되었고 신검이 사면되자 견훤은 울분을 참지 못해 등창이 나 수일만인 '''음력 9월 8일(계해일)'''에 사망하였다는 것이 된다.] 황산(黃山)의 절에서 사망하였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y&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y_002r_0010_0220_0130&position=-1|#]] [[견(성씨)#s-2|황간 견씨(黃澗甄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아자개|아버지]]는 이씨였지만 견훤은 이씨가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의 실전(失傳)으로 인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오늘날 견씨들은 견훤의 막내아들인 [[견능예]]의 후손들로 추정된다.] 그의 아들들인 신검, 양검, 용검, 금강 또한 성씨가 이씨가 아닌 견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견훤]]의 피가 흐르는 가문은 [[견(성씨)#s-2|황간 견씨]]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슬하의 딸들과 결혼한 사위들, 그들 가문이 번창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혼한 집안들을 통해서 혈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계[* 견훤의 딸들을 통해서 파생된 후손들.] 후손으로서 대표되는 집안으로 [[순천 박씨]][* 사위인 [[박영규]]의 집안.], [[평강 채씨]][* [[채송년]]의 외가가 무주 지씨이다.], 광주 지씨[* 사위인 [[지훤]]의 집안.] 등이 전해지고 있다.[* 여계 후손으로만 따지고 보면 이 양반도 [[왕건|숙명의 라이벌]]만큼이나 자손들을 번창시키면서 수많은 후손들을 두게 된 인간 승리자이기도 하다. 다만 [[왕건]]의 경우 여계 후손까지 따지면 후손이 아닌 사람들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에 견훤과 비교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견훤에게는 사서에 드러난 자녀들은 소수에 불과할 정도로 자손이 아주 많았다고 적혀있기 때문에 남계 자손도 성씨 사용이 매우 드물었던 당대부터 계산해 볼 때(소수의 대귀족들이나 대호족들, 그런 전통이 가문에 원래 있었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본격적인 한국의 성씨 사용은 고려 초기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후손이 얼마나 될지 이제 와서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이는 왕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왕씨 왕족들도 조선 왕조가 개창하면서 광범위한 변성을 했기 때문에 남계 후손의 경우도 현대까지 왕씨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고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