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게토 (문단 편집) == [[나치 독일]]의 게토 ==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l9ZKchjLgRs)]}}} || || {{{-2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점령 하의 바르샤바 게토. 바르샤바의 여타 구역과는 벽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Das Judenviertel ist mit Mauern vom Übrigen Warschau abgesperrt.].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유대인은 이쪽 길로 다닐 수 없다![* Benutzung dieser Straßenseite für Juden verboten!]'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통해 그 실상을 알 수 있다. 영상 속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다수가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한 동유럽 점령지의 도시들에서 부활시켜 유대인을 몰아넣을 수용구역으로 이용, 악명을 떨쳤다. [[바르샤바]] 게토가 수용인구 45만 명에 달해 가장 컸고, [[우치(폴란드)|우치]]에 20만, [[르비우]]에 15만, [[빌뉴스]]에 8만, [[크라쿠프]]에 7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이들 대도시 외에 여러 중소도시에도 게토가 세워졌다. 이 게토와 이전의 역사적 의미의 게토의 다른 점은 역사적 게토는 유대인들을 유럽의 다른 토착 기독교도들과 '''분리'''시키기 위해 좁은 구역에서 거주하게 한 반면, 나치가 부활시킨 게토는 이후에 있을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를 위해 세웠다는 점. 당연히 이전의 게토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인구 밀도가 높고[*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3.4㎢의 면적에 45만 명을 수용하여 인구밀도가 10만명/㎢을 넘었다.] 비위생적이었으며 사망률도 비할 수 없이 높았다. 게토에서 굶어죽거나 병사하지 않은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아우슈비츠]] 등의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학살당했다. 2차 대전 당시의 게토는 유럽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에도 있었다. [[상하이]](上海) 등 [[일본군]]의 점령 지역에 거주하던 유대인 또한 일정 구역의 게토에 강제로 수용되었다. 이곳의 주거 환경 역시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그나마 홀로코스트에 끌려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점점 패망하려 들자 폴란드의 게토에 있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 봉기를 시발점으로 무기를 밀수하여 그곳에 있던 나치 독일군들과 해방 전투를 벌였는데 아쉽게도 진압당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민간인 유대인들도 나치 독일군들에게 희생당했다. 여담으로,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그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슈필만이 게토에서 생활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수용소 안에서 유대인들은 도저히 사람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나치 독일군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영화 중 슈필만의 아버지가 감자를 가지고 돌아오던 도중에 나치 장교가 인사를 안했다고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돈을 별로 못 받아 먹을 걸 먹지 못한 나머지 아사(餓死)한 사람들도 많고 도리어 유대인들끼리 서로의 음식을 훔쳐먹거나[* 한 노파가 먹으려고 한 죽을 노인이 훔치려다가 그만 바닥에 쏟았는데 노인은 그것마저도 먹으려고 엎드려서 흙투성이인 죽을 먹으려고 핥았고 노파는 울며 막으려다가 울면서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나치군]]에게 뭐라도 얻어먹으려고 광대같은 짓을 하는 등, 게토에서의 생활을 잘 표현했다. 당시 게토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를 찍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유대계였기 때문에 고증에 신경써서 찍은 편. 같은 시기를 다룬 영화 <[[쉰들러 리스트]]> 에서도 초반에 비중있게 나온다. 독일인 군수사업가로서 유대인 인력을 이용하러 온 상황에서 고급 숙소를 제공 받는 쉰들러와 열악한 환경에 내던져진 강제 이주 유대인들의 상황이 대비된다. 그나마 <피아니스트>의 슈필만 가족은 한 집을 단독으로 배정받았지만, 여기선 아예 한 집에 서로 연고도 없는 여러 가구가 쑤셔넣어진 상황이 묘사된다. 이후 얼마 되지않아 독일은 게토를 끝장내고, 여러번에 걸쳐 수색해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숨어있던 유대인들까지 철저히 학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