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복치반 (문단 편집) === 초창기 ===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단호해 결단을 잘 내렸고, 임기응변과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400년, 걸복건귀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에게 패해 나라가 일시적으로 멸망하자, [[남량]]에 인질로 보내져 서평군(西平郡)에 머물렀다. 이후 남량을 탈출하여 후진에 투항했는데, 후진의 황제 요흥은 걸복치반을 받아주고 진충장군, 흥진태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걸복치반은 승진해 건무장군, 행서이교위(行西夷校尉)에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원천(苑川)에 진수했다. 409년, 아버지 걸복건귀가 다시 서진을 세우고 진왕(秦王)을 자칭할 때 서진으로 돌아가 세자에 임명되고 우승대장군, 도독중외제군사, 녹상서사를 겸했다. 서진을 9년만에 부활시킨 걸복건귀는 후진을 공격해 금성(金城), 약양, 남안, 농서 등의 지역들을 침범했다. 서진의 기세가 매서운 것을 본 요흥이 태사 색릉을 서진으로 보내어 걸복건귀를 달래자, 걸복건귀 또한 사신을 보내 칭신을 하면서 두 세력은 서로 화친하였다. 요흥은 걸복건귀를 하남왕에 봉하고, 세자 걸복치반은 진서장군, 좌현왕, 평창공으로 삼았다. 411년 8월, 중군장군 걸복심건(乞伏審虔)과 함께 남량 정벌을 위해 출병하였다. 남량은 태자 독발호대를 보내 막았지만 영남에서 패했고, 걸복치반의 서진군은 소와 말 10여만 마리를 노획했다. 412년 4월, 걸복치반은 다시 남량을 쳐 백토(白土)에서 남량의 삼하태수 오음(吳陰)을 무찌르고 걸복출누(乞伏出累)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