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복국인 (문단 편집) == 생애 == 걸복국인은 [[선비족]] [[걸복부]]의 수령이었던 걸복사번(乞伏司繁)의 아들로 태어났다. 걸복국인의 아버지였던 걸복사번은 371년에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의 왕통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걸복부의 근거지였던 도견산(度堅山)이 왕통의 기습을 당해 부락이 전부 부견에게 항복하면서, 걸복사번은 결국 전진에게 굴복하였고 남선우로 임명되어 장안에 머무르게 되었다. 선비의 발한(勃寒)이 농우를 침범하자, 부견은 걸복사번을 사지절, 도독 토서호제군사, 진서장군으로 삼아 발한을 토벌하도록 하였고, 걸복사번은 발한 토벌에 공적을 세운 뒤 376년에 사망하였다. 걸복국인은 걸복사번 사후 걸복부의 수령이 되어 아버지의 남선우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전진의 황제였던 [[부견]]은 화북을 통일하여 최강의 세력으로 거듭났고, 강남의 [[동진]]을 토벌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는 상황이었다. 383년, 부견은 남정을 앞두고 걸복국인을 전장군에 임명하여 동진 정벌의 선봉으로 삼았다. 그리고 동진 정벌을 위해 출정하려는 찰나, 걸복국인의 숙부인 걸복보퇴가 농서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부견은 걸복국인을 걸복보퇴의 반란 진압에 파견했다. 이때 걸복국인을 걸복보퇴의 반란 진압에 보낸 것이 결과적으로 걸복국인에게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걸복보퇴는 조카인 걸복국인이 온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여, 조카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이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동진에게 대패하자, 걸복국인은 부견을 배반하고 농서에서 각 부족들을 병탄하니 그 무리가 10만에 이르렀다. 385년, 부견이 [[요장]]에게 살해되자, 걸복국인은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영진•하2주목(領秦河二州牧)을 칭하고 연호로 '건의'(建義)를 선포하며 [[서진(오호십육국시대)|서진]]을 건국했다. 장수 을전음니(乙旃音埿)는 좌상, 옥인출지(屋引出支)는 우상, 독고필제(獨孤匹蹄)는 좌보, 무군용사(武群勇士)는 우보에 각각 임명했으며, 동생 [[걸복건귀]]를 상장군으로 삼았다. 이후 용사(勇士城)에 성을 짓고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 선비족 필란(匹蘭)이 5천 명을 이끌고 서진에 복속해왔다. 386년 정월, 남안의 강족 비의(秘宜)가 주변에 여러 강족 부락들과 연합하여 총 5만 군세를 이끌고 서진을 쳤다. 걸복국인은 단 5천여 병력으로 이들을 기습하여 대패시켰고 비의는 자신의 근거지인 남안으로 다시 도망쳤다. 몇 개월 뒤, 비의가 자신의 동생 막후제(莫侯悌)와 남안인 3만여 호를 거느리고 서진에 투항하자, 비의를 동진주자사, 막후제를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삼았다. 387년, 전진의 황제 부등이 사자를 보내 걸복국인을 대도독, 도독잡이제군사(都督雜夷諸軍事), 대장군, 대선우, 원천왕(苑川王)에 임명하였다. 육천(六泉)에는 밀귀(密貴), 유구(裕苟), 제륜(提倫)이 부족의 대인(大人)으로서 선비족 3부를 거느리고 있었다. 걸복국인이 친히 3만 기병을 이끌고 선비족 3부를 공격하자, 선비족인 고평(高平)의 [[몰혁간]]과 동호(東胡)의 금희(金熙)가 갈혼천(渴渾川)에서 군사를 합쳐 이에 맞섰다. 걸복국인은 몰혁간과 금희를 물리쳐 3천여 명을 죽이고 말 5천 필을 노획하였다. 몰혁간과 금희가 참패하여 돌아온 것을 본 선비족 3부의 대인들은 겁에 질려 군대를 이끌고 서진에 투항했다. 걸복국인은 항복을 받아들이고 밀귀는 건의장군, 육천후(六泉侯)로, 유구는 건충장군, 난천후(蘭泉侯)로, 제륜은 건절장군, 명천후(鳴泉侯)로 삼았다. 서진의 건위장군 질로오고발(叱盧烏孤跋)이 반란을 일으켜 견둔산(牽屯山)에 주둔하자 걸복국인은 걸복건귀에게 7천여 기를 주어 토벌하게 하였다. 질로오고발의 부장인 질나후(叱羅侯)가 군사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오히려 걸복건귀에게 격파당해 전사했다. 이에 겁을 먹은 질로오고발은 반란을 빠르게 접어 항복했고, 걸국국인은 그의 이전 관직을 회복시켜주었다. 388년 4월, 평양(平襄)의 선비족 월질질려(越質叱黎)를 대파하고 그의 아들 월질힐귀(越質詰貴)를 사로잡았다. 그러자 월질질려의 조카 월질복반(越質復半)이 자신의 부락 5천여 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그 해 6월, 재위 4년만에 걸복국인은 사망했다. 걸복국인에겐 적자 걸복공부(乞伏公府)가 있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난세에 맞지 않다 본 신하들이 연장자인 걸복건귀를 추대했다. 그의 뒤를 이은 동생 걸복건귀는 걸복국인을 열조(烈祖) 선열왕(宣烈王)으로 추존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