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군기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육군]] ===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정]]은 정부 설치를 준비하면서 난립한 군사집단을 정리하고 1945년 11월 13일에 국방사령부를 설치한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보안대와 무위대(武衛隊)를 두었으나 미군정이 정부기능을 불허함에 따라 무위에 그친다. 당시 주요 군사단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단체명 || 주요 인물 || 설립일 || 활동내용 || 정치적 성향 || 비고 || || [[조선국군준비대]] || [[이혁기]], 유치옥, 최영 || 1945. 8. 30 || 최대 상비군 1만 5천명, 예비군 6만 명/전국에 예하 지대(支隊) 설립 || 좌익 || 전국군사준비위원회 조직 || || 광복군국내지대 || [[오광선]] || 1945 || 광복군 국내세력/일본군, 만주군 가운데 우익 흡수 || 우익 || 광복군 || || 조선임시군사위원회 || [[이응준]], [[김석원]] || 1945. 8 || [[군경력자]] 친목 도모/치안 활동 || 우익 || 일본 육사 중심 || || 장교구락부 || 김석원, [[신태영]] || 1945. 9 || 군 장교 출신 친목 || 우익 || 일본 육사 중심 || || 학병동맹 || 왕익권, 이춘영 || 1945. 9. 1 || 제국주의 타도, 종로경찰서 인수 || 좌익 || [[조선공산당]]/[[남로당]] 계열 || || 학병단 || [[안동준]], 김원룡, [[김계원]] || 1945. 12. 16 || [[조선경비대]] 주요 참여 || 우익 || 학병동맹이 좌익화되자 탈퇴한 인원들이 결성 || || 한국장교군사 사주비회 || 이단직, 조성환 || 1945. 12. 26 || 교육훈련 목적 || 우익 || || || 대한민국군사후원회 || 조성환, 안재홍 || 1945. 12. 9 || 치안 유지 || 우익 || 광복군 후원회등과 통합 || || 대한민청 || [[김두한]] || || 정치단체 전위대 || 좌>우 || 전과자 중심 || || 육해공군출신동지회 || 김석원, 안승범, 오광선 || 1946. 1 || 군경력자 친목 || 우익 || 사설군사단체 해산 이후 설립 || 이들은 신생 조국의 군대가 되겠다며 독자적인 장교와 사병 양성기관을 세웠다. || 학교명 || 설립일 || 주도인물 || 관련집단 || 비고 || || 조선국군학교 || 1945. 8. 18 || [[김원봉]], 임철재 || 상해임시정부 좌파 주도 || [[양주시]]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 태릉에 있던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를 말한다. 1946년 1월 15일부터는 [[조선경비대]]가 주둔했다. 당시엔 서울이 아니었다.]에서 1, 2차로 학생을 모집해 1,000명 정도를 훈련/ 1946. 1. 10 중앙육군사관학교로 개칭 || || 대한무관학교 || 1945. 11월 초 || [[김구]], 김성호, 이춘경 || 상해임시정부 우파 주도 || 1946. 1. 25 제1기 사관 및 하사관후보생 334명 입교 || || 육군사관예비학교 || 1946. 1. 11 || 오정방 || 조선건국청년회 주도 || || 이들의 활동은 [[미군정]]에서 세운 [[군사영어학교]]와 별도의 행동이었고 임시정부 출신이나 광복군 출신들이 [[군사영어학교]]에 오지 않아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이 대다수를 채우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미 본토는 일본 점령 문제에 몰두하느라 한국에 주둔할 부대를 1945년 8월부터 9월 사이에 12번이나 바꾸었다. 정책에 일관성이 부족했고 미군정의 최고 지휘관인 하지 중장은 야전 출신이며 군정청 내에 행정 경력을 가진 이가 거의 없었다. 이는 일본 총독부에서 일하던 이들의 인적구성이 초기 한국 정부에 상당수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흔히 친일파를 청산했다는 인식의 [[소련]]이 주둔한 [[북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미군정은 갓 전쟁을 마친 터라 [[미군]]을 본국에 돌려보내고 감축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그런 제안이 고려되는 가운데 북한에선 빠르게 군대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주의 계열에서 기존의 사설군사단체를 통합하여 [[보안대]](保安隊)란 공식적인 군사집단을 만든 것에 미군정은 자극을 받았다. 보안대는 뒤에 [[조선인민군]]이 된다. 거기에다 한국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난립하는 것을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당시 미군정 치안국장이자 점령군사령부 헌병사령관이었던 로렌스 시크(Lawrence E. Schick) 준장은 이 문제를 최초로 거론하였다. 군정장관인 아치벌드 아놀드(Archivald V. Arnold) 소장은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당시의 국립경찰[* 일본인들이 [[히키아게샤]]로 일본에 돌아가면서 조선에 있던 경찰병력은 한국인만 남게 되었다. 당시 조선경찰의 30% 정도가 한국인이었고 대부분 하위직이었다.] 외 치안을 유지할 군사집단을 검토하였다. 같은 해 11월 13일에 시크 준장을 책임자로 하는 국방사령부가 발족되었다. 5일 뒤인 11월 18일에 연구팀은 국방군 창설안을 내놓았다. 국립경찰을 보강하기 위해 국방사령부 밑에 경찰대와 육/공군으로 구성되는 국방군,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경찰병력은 25,000명 수준으로 증강하고 국방국 육군은 보병사단 3개 45,000명 수준, 공군은 운송중대와 2개의 전투비행중대를 두고 해안 경비를 위해 5,000명 수준의 해안경비대를 두기로 했다. 인원 편성은 미군 스타일을 따르고 장비는 미군에서 남는 것으로 충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시크의 계획안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측의 반대에 부딪힌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군을 창설하는 일이 자신의 권한 밖이라며 치안유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반대했다. 시크의 계획안은 수포로 돌아갔는데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미국 정치권에선 한국에서 군대를 만드는 일이 소련을 자극하는 일이 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고 일본도 당시엔 한참 비군사화가 진행 중이었다. 중국 대륙에선 아직 [[중화민국]]이 굳건히 버티는 상태였다.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은 맥아더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의 국방군 창설 문제는 연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 중장은 12월 20일에 국방사령부 사령관에 새로 챔프니 대령을 임명하며 시크의 계획안을 소형화하고 현실적으로 개편하라고 지시했다. 그의 계획은 뱀부(bamboo) 계획이라 불렸다. 그의 계획안은 당시 국방사령부의 한국인 고문이었던 [[이응준]][* 일본군 대좌 출신이다.]의 조언을 받은 것이다. 뱀부계획에 따라 창설될 경찰예비대의 인원 규모는 다음과 같다. 규모는 8개 연대로 25,000명이며 각 도마다 1개 연대를 배치한다. 한 개 중대의 편제는 장교 6명에 사병 225명이며 처음엔 도마다 한 개 중대를 설치하고 인원이 20%를 초과할 때마다 중대를 신설하고 3개 중대가 되면 본부중대와 대대본부를 구성하여 한 개 대대를 편성한다. 이런 식으로 연대가 될 때까지 계속 증설한다. 창설요원은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2명을 각 도마다 배치한다. 경찰예비대는 1950년에 세워진 육상자위대의 전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처럼 1946년 당시에는 정식 군대를 만드는 것보다는 경찰을 보조하는 치안부대에 가까웠다. 뱀부 계획은 맥아더에게 보고됐고 맥아더는 합참에 이를 보고했다. 그리고 합참에 잉여무기 등을 요청했다. 합참이 이를 승인하면서 경찰예비대는 창설 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무장집단의 형성은 상당히 [[소련]]의 반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미군정청은 미군정법령 제28호 국방사령부 설치법령으로 창군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5일에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감리교 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세웠다. 개교 이전에 챔프니 대령은 여섯 개 사설군사단체의 대표를 불러 군경력자들을 적극 입교시켜줄 것을 부탁했다. 1946년 2월 27일에는 현재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인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태릉(현재의 도봉구 화랑로[* [[도로명주소]] 이전에는 공릉동이었다.])의 구 일본군지원병훈련소로 옮겼고 1946년 4월 30일 폐지할 때까지 경찰예비대 창설요원 110명을 배출하였다. 87명은 일본군, 21명은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그 가운데 68명은 학병 출신이었다. 미군정은 군경력자들을 적극 채용할 계획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미군정기의 공용어는 [[영어]]였기 때문에 초보적인 군사영어를 교육할 필요가 생겼다. 게다가 군사단체들이 정치단체와 연결되어 폭력행위를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에 통제가 필요했다. 군사영어학교의 교장은 미군 리스 소령이었고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미군 장교 셋에 부교장으로 [[원용덕]][* 만주군 군의관으로 중교 출신이다.]과 원용덕의 [[연세대학교|세브란스]] 동창이었던 최용준과 임영채 목사가 교관으로 참석했다. 5개월 동안 리스 소령과 매커리 소령, 그린 대위, 비숍 대위 등 교장의 교체가 잇따르면서 교육 과정은 상당히 파행이었다. 군사영어를 습득하는 게 목표라서 훈련 등의 구령도 영어로 했으며 한국역사나 참모학, 소화기기계훈련, 자동차교육 등이 있었으나 교육효과는 미미하였다. 상당수가 일본군에서 교육을 받은 탓에 영어로 구령을 넣어야 하는데 [[일본어]]로 구령을 넣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다른 과목이 엉망으로 굴러가는 동안에도 영어는 매일 시험을 치렀다. A반부터 D반까지 실력에 따라 편성됐는데 A반은 영자지인 라이프를 읽을 수준이었고 D반은 [[알파벳]]과 숫자부터 가르쳤다. 성적순에 따라 반을 다시 편성했는데 이는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에서 쓰던 교수법이었다. 학생들은 통역관 수준의 경제적 대우를 받았다. 그때문에 봉급도 받았는데 첫 달엔 900원을 받았고 1946년 1월부터는 1,300원을 받았다.[* 해방 직후의 [[인플레이션]] 때문이다.] 당시 1,300원은 쌀 1.5가마(135L)를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군사영어학교의 입학 자격 기준은 해방 전에 장교나 준사관, 사관후보생 이상의 군경력이 있으면 가능했다. 학력은 중학교 이상이면 충분했다. 되도록이면 소장파로 뽑았는데 군사영어학교에서 사설군사단체들이 파벌질 하는 걸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1기는 60명인데 광복군 등 중국군 출신 20명, 만주군 20명, 일본군 20명으로 뽑으려고 했다. 일본군은 [[이응준]]이 만주군은 [[원용덕]]이 중국군은 [[조개옥]]이 추천하기로 했다. 이응준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6기 출신으로 [[홍사익]]과 동기이다. 남한 지역에 있던 일본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 홍사익은 전범으로 체포된 상황이었고 [[영친왕]]은 일본에서 발이 묶여 돌아오지 못 했다.] 1919년 3. 1 운동 당시에 일본육사에 있던 [[김경천]], [[지청천]]이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같이 모의했으나 본인은 가지 않았다. [[원용덕]]은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만주군 군의관으로 입대해 중령까지 올랐고 당시 한국에 있던 만주군 출신 중에 최고 계급자였다. [[조개옥]]은 중국의 보정군관학교[* 군벌이 난립하던 시절에 중국은 지방마다 사관학교가 존재했다.]를 나와 화북의용군 여단장으로 [[준장]][* 화북의용군에선 참장(參將)이란 표현을 썼는데 [[대한제국군]]의 표현과 일치한다.]에 오른 자였다. 이들의 추천이 중요했기에 선발시험은 사실 형식적인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력서를 제출하고 시험관인 챔프니 대령과 군사국 차장인 리아머 아르고(Reamer W. Argo) 대령의 면접을 하고 신체검사를 받으면 시험을 마쳤다. 즉 군경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신체만 멀쩡하면 입학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1기 60명 가운데 1946년 1월 15일에 경비대가 창설되자 21명은 창설요원으로 임관했다. 나머지는 10여 회에 걸쳐 나눠서 임관했다. 경비대가 생기자 서류상으로만 입교시키고 바로 현지에 부임한 경우도 많았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인 [[백선엽]]이나 만주군 상위 출신인 [[김백일]], 학병 소위 출신인 [[정진운]]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외에 경비대에 사병으로 입대한 인원 중에 자격이 있다 싶으면 창설요원들의 추천을 받아 장교로 임관시키기도 했다. 학병 소위 출신인 [[유흥수]]나 지원병 준위 출신인 [[함병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경비대 1연대 사병으로 입대하여 근무했는데 지휘관 [[채병덕]] 대위(정위)의 추천으로 현지에서 임관되었다. [[이응준]] 같은 경우엔 국방사령부의 고문이라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는데 뒤늦게 군사교육을 받기에 모양새가 이상하니 ~~대령 출신이 받으려니~~ 소급해서 졸업했다고 서류상으로 처리했다. [[원용덕]] 같은 경우엔 부교장이면서 학생이었다. 당시 200명 정도의 군경력자를 모았는데 110명이 군사영어학교를 나왔고 40명 정도는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한 뒤에 만든 경비사관학교 1기생(육사 1기에 해당한다)으로 재입교해서 1946년 6월 15일에 임관했다. 나머지는 퇴교하거나 임관하지않고 대신 통역관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실적에 따라 진급한단 구조였는데 대령이나 중령했던 사람이 소위로 임관하는 건 문제가 있다며 특례를 적용했다. 중국군 같은 경우엔 같은 연령대의 일본군과 비교할 때 계급이 높은 경향이 있어서 일본군 수준으로 조절했다. [[이성가]](국부군 소교)[* 그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온 국부군 출신 둘 중 한명이다 다른 한 분은 [[유해준]].], 백선엽(만주군 중위), 김백일(만주군 상위), 최남근(만주군 상위) 등은 소위(참위)로 임관했다. 이형근(일본군 대위), 채병덕(일본군 소좌), 유재흥(일본군 대위), 장석윤(일본군 중위), 정일권(만주군 상위) 등은 대위(정위)로 임관했다. 원용덕(만주군 중교)은 소령(참령)으로 임관했고 이응준(일본군 대좌)은 대령(정령)으로 임관했다. 이런 인원구성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일본육군사관학교|일본육사]] || 13명 || || 지원병 || 6명 || || 학병 || 68명 || || [[만주군]](일본육사유학) || 5명 || || 만주군([[만주국육군군관학교]]) || 16명 || || [[한국광복군]] || 1명 [* 유해준 장군] || || [[국민혁명군]] || 1명 [* [[이성가]] 장군. 그는 독립군 이관석 장군의 아들로 남경군관학교로 진학한 까닭에 왕정위군으로 임관하여 소교로 있던 중 중경정부 남의사 북평 담당자와 접선, 남의사 활동을 겸하다 종전 전 국민혁명군 11군으로 투신하였고 종전 후 광복군 북평잠편지대장 군사부장을 지냈다.] || 만주군이 일본군의 괴뢰군이었으므로 군사영어학교 등 경비대 창설인원 가운데 98.2%가 일본군 출신이었고 1.8%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110명 가운데 60여명이 한반도 남부, 40명은 한반도 북부 출신이었고 10여명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월남]]이 본격화될 때가 아니라 남한에 북부 출신들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북부 출신이 많았던 건 한반도 북부에 일본군 기지가 많고 만주와 가까웠던 탓이 작용했고 당시 [[소련군정]]과 공산주의 계열에서 일본에 [[부역]]한 이들을 강하게 처벌한다는 소문이 돌아 장교 출신들이 대피한 탓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백선엽]]은 자신이 만주군 간도특설경비대에서 공산계 군사집단인 만주항일게릴라들과 싸웠기 때문에 북한에선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거라 판단해 선배인 [[정일권]]을 설득해 월남했다. 월남한 이들 북부 출신 군경력자들은 남부에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없던 탓에 군대에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1대부터 18대까지는 전원이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며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다.[* 다만 지원병이나 학병 출신의 경우 친일 경력에 있어서 일본육사 및 만주군관학교 출신과 구분지을 필요가 있다.](이 부분에서 사실 누락된 문제가 있다. 1948년 육군총사령관 직책으로 [[송호성(군인)|송호성]] 장군이 있었다. 당시 육군총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의 원래명칭이었다. 하지만 1대 [[송호성(군인)|송호성]](광복군 출신) 장군의 전시 월북문제와 월북후 행적문제가 여전히 논란중인 사항이라서 한국군으로서는 흑역사로 취급되었고 이점은 실질적으로 기록말살을 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 대 || 계급 || 이름 || 출신 || || 1 || 준장 || [[이응준]] || 일본육사 || || 2 || 소장 || [[채병덕]] || 일본육사 || || 3 || 소장 || [[신태영]] || 일본육사(특임) || || 4 || 소장 || 채병덕 || 일본육사 || || 5 || 중장 || [[정일권]] || 만주군 || || 6 || 중장 || [[이종찬]] || 일본육사(특임) || || 7 || 대장 || [[백선엽]] || 만주군 || || 8 || 대장 || 정일권 || 만주군 || || 9 || 대장 || [[이형근]] || 일본육사 || || 10 || 대장 || 백선엽 || 만주군 || || 11 || 중장 || [[송요찬]] || 지원병 || || 12 || 중장 || [[최영희(군인)|최영희]] || 학병 || || 13 || 중장 || [[최경록]] || 지원병 || || 14 || 중장 || [[장도영]] || 학병 || || 15 || 중장 || [[김종오]] || 학병 || || 16 || 대장 || [[민기식]] || 학병 || || 17 || 대장 || [[김용배]] || 학병 || || 18 || 대장 || [[김계원]] || 학병 || 학력사항은 아래와 같다. || || 대학 재학 이상 || 전문학교 || 중학교 || 미확인 || 총계 || || 일본육사[* 사관학교를 나오면 학사이지만 여기서는 육사 입학전의 최종학력을 말한다.] || - || - || 9 || 4 || 13 || || 지원병 || 1 || 1 || 3 || 1 || 6 || || 학병 || 40 || 12 || 6 || 10 || 68 || || 만주군 || 12 || 2 || 2 || 5 || 21 || || 중국군 || 1 || - || - || 1 || 2 || || 계 || 44 || 15 || 23 || 28 || 110 ||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창설과 동시에 1946년 2월 1일 장병의 [[계급]]호칭·[[계급장]]을 제정했는데, 대한제국군의 계급을 참고로 하여 장교는 참위-부위-정위-참령-부령-정령, 하사관은 참교-부교-특무부교-정교-특무정교-대특무정교, 병은 이등병-일등병으로 제정했다. 하지만 나중에 일본군 출신들이 일본군식 계급제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가 임정요인들과의 절충을 통해서 1946년 12월 1일 [[미 육군]]계급제도를 참조하여 장교는 소위-중위-대위-소령-중령-대령, 하사관은 하사-이등중사-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로 변경하였다. 창설요원은 각 연대별로 미군 장교 2명,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미군 사병 1명[*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던 탓에 영어는 못 알아들어도 일본어는 알아듣는 사람이 많았고 미국에도 한국어보다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과 한국인 군경력자 3-5명 정도로 구성됐다. 공식적인 지휘권은 1946년 9월에 한국인에게 넘어갔다. 1946년 1월 15일 [[경기도]]에 조선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됐고 4월 초에는 8개의 연대가 창설됐다. || 연대명 || 창설일 || 한국인 창설요원 || 주둔지 || 초대 [[지휘관]] || || 제1연대 || 1946년 1월 15일 || [[채병덕]], [[정일권]], 장석윤, 강문봉, [[백인엽]]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군사영어학교가 있던 자리로 과거에는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가 있었고 현재는 육군사관학교 자리다.] || 채병덕 [[대위|정위]] || || 제2연대 || 1946년 2월 28일 || [[이형근]], 심언봉, 정진원, 조상철 || 충남 대전비행장 || 이형근 정위 || || 제3연대 || 1946년 2월 26일 || [[김백일]], [[김종오]], [[이한림]], 정래혁, 백인기 || 전북 이리[* 일본군 해군 예비대(일본어로는 예과대豫科隊)가 있던 곳이다.] || 김백일 [[중위|부위]] || || 제4연대 || 1946년 2월 15일 || 김홍준, 조암, 최홍희 || 전남 광산군 극락면[*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일본어로는 예과훈병사豫科訓兵舍)가 있던 곳이다.] || 김홍준 부위 || || 제5연대 || 1946년 1월 29일 || [[박병권]], 이지업, [[오덕준]] || 경남 부산시 감천동[*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 박병권 [[소위|참위]] || || 제6연대 || 1946년 2월 18일 || 김영환, 하재인, 김원룡, 장도영 || 경북 대구시 중동[* 일본군 해군 예비훈련소가 있던 곳이다.] || 김영환 참위 || || 제7연대 || 1946년 2월 7일 || [[민기식]], [[문용채]], 오일균, 이희권, 최창언 || 충북 청주군 사천면 개설리 || 민기식 참위 || || 제8연대 || 1946년 4월 1일 || 김종갑, 황헌친, 김병일 || 강원 춘천시 || 김종갑 부위 || || 제9연대 || 1946년 11월 16일 || || 제주도 || 장창국 정위 || 창설요원으로 장교는 생겼으니 사병 모집이 문제였다. 먼저 경찰 내부와 사설군사단체들에 광고를 하여 군경력자를 모집했고 라디오방송과 지역신문에 광고를 실었다. 절차는 면접을 거친 뒤에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인근 병원에서 신체검사와 예비접종을 하면 됐다. 경기도에 주둔했던 제1연대는 1개 중대 225명을 선발하기 위해 모병을 했는데 1천명이 응모했다.[* 자위대도 1950년에 경찰예비대 7만 5천 명을 모집할 때 38만명이 몰렸다. 당시는 인플레이션과 실업난이 심각했다.] 다만 경기도 외의 다른 지방은 모병이 기대보다 적었다. 그때문에 장교들이 직접 모병 활동을 하고 다녔다. 초반엔 보급이 엉망이었다. 병영식의 경우엔 중앙으로 조달되는 현금으로 때웠으나 그 외에는 엉망이었다. 의복과 장비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것을 지급했다. 장비는 일본군이 썼던 [[38식 소총]]이나 [[99식 소총]]을 썼다. 소총은 그나마 6천 정 정도 수준이었고 탄알은 9만 발에 불과했다. 교육훈련도 부실했고 일단 인원 불리기에 집중했다. 통일된 지휘방침이나 교육방안도 없었는데 이는 당시 경비대의 법적지위가 경찰의 예비나 보조부대라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자위대]]와 비슷한 처지였던 셈이다. 미군정은 개인화기 이상의 무기 조작법 교육은 금지했고 도수훈련, 집총훈련, 총검술 외에는 모두 치안유지를 위한 폭동대처 등의 훈련에 치중했다. 다만 백선엽은 미군 고문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술기동훈련을 했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소련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국의 무장에 소극적이던 태도에서 입장을 바꿨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화를 검토하도록 영향을 주게 되고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은 시기를 앞당긴다.] 같은 해 3월 29일에 미군정법령 제63호는 국방사령부에 있던 경무국(경찰)을 독립시켜 군정청 내에서 치안담당부서와 국방담당부서를 구분하였다. 같은 날에 64호를 내어 각 부서를 국(bureau)에서 부(department)로 승격했는데 국방사령부(Office of Director of National Defense)는 국방부(Department of National Defense)로 승격됐다. 그러면서 군사영어학교를 폐지하고 정식으로 장교를 양성할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조선경비사관학교)를 세웠고 군정청의 예산 1/3이 경비대 예산이 되었다. 1946년 6월 15일엔 국방부가 국내경비부-또는 통위부(統衛部[* 이 명칭은 조선말 군제 3영(營)의 하나인 중영, 즉 우영·후영·해방영을 통합한 명칭인 통위영에서 따온 것이다.], 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는 등 흐름은 위축되는 듯 했다. 이는 5월 20일에 재개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소련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1946년 9월 11일 경비대에 배치됐던 미군 고문관들은 한국인 지휘관으로 대체되었고 통위부의 담당자도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9월 12일에 일본육사 15기 출신으로 망명해 [[한국광복군]] 참모총장을 지낸 [[유동열]]이 통위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일본군]]과 [[만주군]]이 주를 이뤄 경비대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비판을 의식한 것이었다. 유동열이 들어오면서 광복군 출신들도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12월 7일에 통위부 참모총장에 이형근 중령이 선임되었다. 1946년 말엔 도마다 연대가 하나씩 자리를 잡았고 제주도에도 한 개 연대를 신설해 9개 연대가 되었다. 1946년 11월말 기준으로 경비대의 병력은 장교 143명, 사병 5,130명이었다. 1946년 7월에 국립경찰은 23,000명이었다. 경비대는 시설이나 장비, 의복 등에서 아주 열악했다. 그때문에 초기의 창설요원들은 근처의 미군기지 등을 방문해 미군과 협상을 벌여 물자를 획득해야했다. 파벌 문제도 심각했는데 [[이형근]]과 [[채병덕]]의 대립이 주됐다. 이형근은 장인이 당시 최고계급자였던 이응준 대령이었다. 채병덕 쪽엔 만주군 출신인 원용덕 등 북한 출신들이 참여했다. 채병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참모총장이 되자 [[양국진]], [[강문봉]], [[백선엽]], [[정일권]] 등의 자기파 인물을 기용했다. 뒤에 광복군 출신이 들어오자 광복군들도 자신들의 파벌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 국방부장관|통위장관]]이었던 유동열의 영향력이 작용했다. 그는 광복군 준장(참장) 출신인 [[송호성(군인)|송호성]]을 제2대경비대사령관에 기용했고 광복군 대령(정령) 출신인 [[최덕신]]을 제2연대장에 중국군 중령 출신인 오동기를 경비대 감찰총감 등에 중용했다. 다만 이들은 숫자가 적었던 탓에 큰 파벌을 이루진 못 했다. 가장 다수를 이룬 출신이 일본군이었기에 창군 초기 국군도 엄격한 규율과 절대복종, 절대충성 등을 강조하는 일본군 병영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중국군(국민당군)식의 군사적인 문화도 영향을 끼쳤다.] 이형근의 경우 일본군 장교제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일본도]]를 지휘도로 차고 근무했다. 이 때문에 미군 고문과 자주 갈등을 빚었다.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0081701461130003010-001.jpg]] 1946년 초가을에 [[광주광역시|광주]]에서 시가행진하는 조선경비대 4연대. 1947년 12월 1일, 미 군정은 기존 9개 연대에 제1·2·3[[여단]]을 창설하였고, 미 합동참모본부가 경비대의 50000명 증강계획을 승인하자, 1948년 4월 29일에 추가로 제4·5여단을 창설하였다. || 여단 || 창설일 || 위치 || 초대 지휘관 || || 제1여단 ||<|3> 1947년 12월 1일 || [[서울특별시|서울]] || 송호성 [[준장]] || || 제2여단 || [[대전광역시|대전]] || 원용덕 [[대령]] || || 제3여단 || [[부산광역시|부산]] || 이응준 대령 || || 제4여단 ||<|2> 1948년 4월 29일 || [[수색]] || 채병덕 대령 || || 제5여단 || [[광주광역시|광주]] || 김상겸 대령 || 이와 함께 1948년 5월 1~4일 사이에 제10·11·12·13·14·15연대를 창설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8월 15일 까지 조선경비대 육군은 5개 여단, 15개 연대, 50490명의 병력으로 성장하였다. || 연대 || 창설일 || 위치 || 초대 지휘관 || || 제10연대 ||<|3> 1948년 5월 1일 || [[강릉시|강릉]] || 백남권 [[소령]] || || 제11연대 || [[수원시|수원]] || 박진경 [[중령]] || || 제12연대 || [[군산시|군산]] || 백인기 중령 || || 제13연대 ||<|3> 1948년 5월 4일 || [[온양]] || 이치업 중령 || || 제14연대 || [[여수시|여수]] || 이영순 소령 || || 제15연대 || [[마산]] || 조암 중령 || [[파일:external/a99c6b64151c4ec08bfa29605e36300eb518b8429d5d5ad06c708aef282afa5a.jpg]] 1948년 8월 15일에 [[서울]]에서 시가 퍼레이드를 벌이는 국군. 흰 정복을 입은 것은 당시 [[조선해안경비대]]원.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과 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이 공포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미군정]]은 끝나고, 통위부의 행정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로 이양되었으며, 8월 16일 [[이범석]] 장군이 초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장관]]에 취임했다. 9월 1일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되었고, 9월 5일에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1월 30일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12월 7일 국방부직제(대통령령 제37호)가 제정·공포됨으로써 12월 15일부터 통위부가 국방부로, 조선경비대·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해군으로 정식 편입·법제화되었다. 국군조직법에 따라 국방부에 [[국방참모총장|참모총장]]을 두고, 그 밑에 [[대한민국 육군본부]]와 [[대한민국 해군본부|해군본부]]를 설치하였으며, 각 군을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하고, "필요할 때에 육군 항공병은 [[대한민국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고 하여 [[대한민국 공군]] 창설을 명시해두었다. 이범석 국방장관은 [[광복군]] 출신인 [[최용덕]] 장군을 [[대한민국 국방부차관]]에, [[일본군]] 출신인 [[채병덕]] [[대령]]을 국방부 참모총장에 임명하였고, 11월 20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총참모장]]에 [[이응준]] [[대령]]을 임명하있다. 창설 당시 국방부 기구는 비서실·제1국·제2국·제3국·제4국·항공국으로 조직되었고, 국방부참모총장·참모차장이 연합참모회의와 육군본부·해군본부를 관리했다. 육·해군 본부의 [[참모총장|]]과 참모부장이 각군을 관리했다. 12월 10일 [[이응준]]·[[채병덕]]·[[송호성(군인)|송호성]]·[[손원일]]이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 [[김홍일(군인)|김홍일]]이 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 다섯명이 국군 최초의 장관급 장교로, 12월 22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이 직접 [[계급장]]을 수여하였다. 2개월 후인 1949년 2월 4일 위 다섯명 중 송호성을 제외한 네명이 [[소장(계급)|소장]]으로 진급하였고, 같은 날 [[정일권]]·[[이형근]]·[[원용덕]] 대령이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이범석 장관의 국군 육성 방침에 따라, [[일본군]], [[만주군]], [[광복군]] 출신 경력자들이 [[육군사관학교|육사]] 7기 특기와 육사 8기 특기로 대거 입교하여 일부는 3주간의 견습과정만 거친 뒤 대령 임관되기도 했다. 한편 1949년 3월 21일, 2대 국방장관에 취임한 [[신성모]]는 국방기구의 간소화를 도모한다는 이유로 5월 9일 국군조직법 제7조에 명시된 육·해군을 통할 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 제도와 연합참모회의를 폐지하고, 장관이 직접 각군 총참모장을 통솔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이 제6여단 제8연대 2개 대대의 [[월북]]으로 사퇴의사를 밝힌 이응준 육군총참모장에 이어 2대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5월 12일에는 육·해군본부의 참모부장제가 작전참모부장제와 행정참모부장제로 개정되었다. 1948년 9월 조선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됨에 따라 조선경비대총사령부는 육군총사령부로 개칭되었으며, 경비대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은 육군총사령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그 뒤 12월 15일에 육군총사령부는 다시 육군본부로 개칭, 11월 20일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제1여단장 이응준 대령이, 육군참모부장에는 정일권 대령이 취임했다. 육군은 1948년부터 1949년 6월까지 빠진 제16·17·18·19·20·21·22·23·25연대와 [[독립기갑연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중 제20연대는 광주의 제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의 제6연대를 해체하여 개편한 것이고,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 사건]]을 일으킨 제14연대가 1948년 10월 28일에 해체됨으로써 1949년 6월 까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20일, 제4여단을 제6여단으로 개편하고, 1949년 1월 7일에 용산에서 창설한 제7여단을 2월 1일에 수도여단으로 개칭하였다. 각 연대의 창설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1949년 5월 12일 국군조직법에 따라 제1·2·3·5·6·수도여단을 각각 사단으로 승격·개편하였으며, 이와 함께 총참모장 밑에 한명으로 되어있는 참모부장제를 작전참모부장과 행정참모부장 2명으로 편성했다. 6월 20일에는 수도사단을 제7사단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제8사단과 사단급인 수도경비사령부를 창설했다. || 사단 || 창설일 || 장소 || 초대 지휘관 || 비고 || || [[제1보병사단|제1사단]] ||<|6> 1949년 5월 12일 || 수색 || [[김석원]] 대령 || 제1여단 승격 || || [[제2보병사단|제2사단]] || 대전 || [[유승렬]] 대령 || 제2여단 승격 || || [[제3보병사단|제3사단]] || 대구 || [[최덕신]] 대령 || 제3여단 승격 || || [[제5보병사단|제5사단]] || 광주 || [[송호성(군인)|송호성]] 준장 || 제5여단 승격 || || [[제6보병사단|제6사단]] || 원주 || [[유재흥]] 대령 || 제6여단 승격 || || [[제7보병사단|수도사단]] || || || 수도여단 승격 || || [[제7보병사단|제7사단]] ||<|3> 1949년 6월 20일 || 용산 || 이준식 대령 || 수도사단 개칭 || || [[제8기동사단|제8사단]] || 강릉 || 이형근 준장 || || || [[수도기계화보병사단|수도경비사령부]] || 용산 || 권준 대령 || || 또한 육군은 국군조직법에 따라 보병·기병·포병·공병·기갑병·항공병·방공병·통신병·헌병 등의 병과가 제정됨에 따라 미 군사고문단과 협조하여 12개 군사학교를 창설하였다. || 학교명 || 창설일 || 초대 학교장 || 창설 위치 || || 육군통신학교 || 1947년 1월 20일 || 한당옥 대위 || 진해 || || 육군병기학교 || 1948년 10월 5일 || 박종민 소령 || 부평 || || [[육군공병학교]] || 1948년 11월 25일 || 오창근 대위 || 김포 || || 육군헌병학교 || 1949년 1월 16일 || 문용채 소령 || 용산 || || 육군군악학교 || 1949년 5월 1일 || 김판기 소령 || 장충동 || || [[육군정보학교]] || 1949년 5월 20일 || [[백선엽]] 대령 || 수색 || || 육군참모학교 || 1949년 7월 1일 || [[채병덕]] 소장 || 용산 || || [[육군보병학교]] || 1949년 7월 29일 || [[김백일]] 대령 || 시흥 || || 육군군의학교 || 1949년 8월 15일 || 박동균 대령 || 부평 || || 육군경리학교 ||<|2> 1949년 10월 15일 || 최경남 중령 ||<|3> 용산 || || 육군병참학교 || 백선진 중령 || || [[육군포병학교]] || 1949년 10월 25일 || [[신응균]] 대령 ||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육군은 총 8개 사단과 22개 연대 및 지원부대와 특과부대, 94974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