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건군기 (문단 편집) === [[징병]]대상자 출신 === 두번재로 학병 등 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케이스이다. 1938년 [[지원병]]제, 1943년 [[학병]]제, 1944년 징병제로 [[일본군]]은 부족한 병력을 [[한반도]]에서 차출했는데 육군에 186,980명, 해군에 22,290명[* 다만 수상함 근무자보다는 육전대 등 지상근무자가 많았다.]이 끌려갔다. 군경력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지원병은 1944년까지 17,664명이었다. 선동에 끌린 이들도 있고 강요에 의한 자도 있어 굉장히 들쭉날쭉한 편이었다. 이들은 별도의 사전군사교육 없이[* 일본 육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일본군 병으로 입대해 훈련을 받은 뒤 근무했는데 일부는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부사관이나 장교로 진급했다. 지원병 가운데 100명 이상이 국군 창군 과정에 참석했다.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었다. 학병은 미군의 OCS제도와 유사한 제도로 간부후보생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는데 소모품으로서 [[소대장]]에 가까웠다. 일단은 병으로 간 지원병보다는 군사경력이 짧지만 한국군 창군 과정에 90명 가량이 참여했다. 이들은 일본육사나 지원병보다는 친일 문제에서 떳떳한 편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구제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자들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 계층이었고 [[군사영어학교]] 등에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구제전문학교 출신은 현재 인구 비율 및 학적 현황과 비교하면 현재의 박사 비율보다도 희소한 가치를 지녔다. 구제전문학교 출신조차 이 정도 비율이었으니 그보다 격이 높은 [[구제고등학교]], 그리고 대학 졸업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단순히 떵떵거리고 살 수준이 아니었다.] [[김계원]]이 대표적인 학병 출신이다. 다만 단점으로는 일본육사 출신들이 비슷한 집단생활 경험을 공유하는 것과 달리 그런 경험이 없어 응집력이 약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