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함거포주의 (문단 편집) ==== 전함 ==== > [[진시황]]은 [[아방궁]]을 만들었고, 일본해군은 [[야마토급 전함|전함 야마토]]를 만들어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겼다. - 제1항공함대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1942년 4월 28일 야마토 함상 제 1단계 작전연구회 > 대포가 없어지면 자신들은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병술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병기의 구성을 바꾸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대함거포주의에 입각해 세워진 조직을 바꾼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인정에 약하고 풍파를 싫어하는 일본인의 성격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 겐다 미노루, '해군항공대, 발진' > 이미 전함은 유용한 병종이 아니다, 지금 중시되는 것은 단지 종래의 관성. 우상숭배적 신앙이 되어가고 있다. - 1942년 5월 11일, 제2함대 포술참모 후지타 세이지 [[쓰시마 해전]]의 승리, 그리고 [[유틀란트 해전]]으로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은 사실상 상식으로 굳어졌으며 전함은 전략무기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한편 일본에서는 쓰시마 해전의 승리, 그리고 미래의 주적으로 대두된 영국 및 미국과의 국력차, [[러일전쟁]]에서 대두된 대로 '''강대국과 총력전 내지는 소모전을 벌일 국력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현실적 문제 앞에서 오로지 한타 싸움에서의 승리에 의한 단기결전으로 마무리짓는다는 전략을 구성하게 된다. [[일본군 해군]]이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집착했던 개함우월주의, 거함거포주의,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은 바로 이런 사정에 기인한다. [[드레드노트급]]의 도입 이래, 노하우 부족과 경제력 부족이 겹쳤던 후소급과 이세급만 예외일 뿐 이외 공고급, 나가토급, 야마토급은 등장 당시 세계 최대 대구경 함포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거함거포주의의 시대 거포를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정석적이고 영국 역시 13.5인치의 오리온급, 15인치의 퀸 엘리자베스급 또한 등장 당시 최대 구경이었다. 영국이 대구경포를 올리기 그만둔건 1차대전 이후 경제가 기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건함경쟁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은 군축조약을 주도하여 건함 경쟁을 억제하고 상대방(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일본)의 대구경화에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구경을 올린다. 이후 건조된 신형 전함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14인치 주포를 사용한 KGV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거함거포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반면 미국은 거포의 탑재보다는 기존 주포의 다연장화에 더 신경을 쓴 경우. 포탄이 좀 더 묵직하기는 한데 이건 대낙각탄을 노리고 만든거다. 그러나 세계 공동 1위 해군국이 주포 구경 확대를 보류하는 상황에서 41cm와 46cm 함포의 세계 최초 도입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는 격이었다. 88함대 계획도 취소되며 이들 신형 거포를 갖춘 전함은 각 2척씩밖에 건조되지 못했다. 이렇듯 위로는 전함부터 아래로는 구축함까지 하나같이 거함거포주의에 기반한 함대결전을 목표로 건조되었다. 심지어 거함거포와는 거리가 좀 멀어지는 함종인 구축함도 전부 고속성능과 뇌격능력을 중시한 이른바 함대형 구축함으로 건조된 것도 모자라서 구경은 5인치지만 장포신을 사용하는 등 거함거포주의의 영향을 제대로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해군은 세계 3위의 규모를 자랑했지만, 실제로는 모든 전략전술, 편제, 무기체계, 훈련이 오로지 '''결전 전력''' 구성에만 집중되면서 해상호위, 대잠전, 군수지원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개전 당시 일본해군에 호위함이라고는 시무슈급 4척이 전부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대결전에만 특화된 불균형한 해상전력은 태평양전쟁 내내 일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과달카날 전역]],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 굵직한 해전에서 [[연합함대]]가 보인 졸렬한 모습의 원인 중 하나는 [[남방작전]]으로 상당한 양의 석유를 확보하고도 세계 3위라는 해군력을 '''필요할 때 필요한 위치에 전개시킬 수 없었다'''라는 부족한 군수지원능력도 한몫한다. 어차피 그 이전 [[미드웨이 해전]] 때는 그런 문제가 없었음에도 전함을 주력, 항공모함을 보조로 여긴 포진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은 것을 보면 그것만도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게 기형적인 집중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과의 한타 싸움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함대전력이라는 소위 '[[88함대]] 계획' 및 '[[런던 해군 군축조약|대미 7할론]]'에 맞추어서 갖추기에도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방어력 부족으로 함대결전에는 투입이 어려운 [[공고급 순양전함]] 4척[* 2번함 히에이는 원래 정리대상이었지만 1차 런던 조약의 결과 연습함으로 살아남고 이후 다시 실전사양으로 개장되어 참전한다.]을 포함한 10척의 주력함 보유를 인정받게 되지만 공고급이나 후소급, 이세급은 이미 성능 부족이 드러난 상태로 그렇다고 신조 전함을 건조할 돈도 없는 일본은 이들 전함군에 대해 1930년대 대대적인 근대화개장을 시전, 내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전함전력의 구성에 성공한다. 그러나 설계와 건조기술 자체가 후진적인 후소, 이세급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으며 나가토급은 '''쓰시마 해전의 전훈까지 무시'''해가며 고속전함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공고급도 이 와중에 대개장 후 속도가 26노트로 떨어지지만 '''방어력도 떨어지는 함이 속도까지 느려지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는 문제가 대두되고 결국 '''다시 대개장'''후 겨우 30노트를 확보, 결전 전력에서 제외되며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 전함군은 장갑 강화, 보일러 및 주기관(나가토급 제외)까지 전면교체하는 대개장 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로 미영에 상당수 남아 있었던 동세대 전함군보다 빠른 속도를 내서 속력만큼은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보다도 조금(0.5노트) 빨랐으나 '''결전병기'''였다는 입장 탓에 활약상은 천지차이다. 그나마 쓸만했던 고속전함 나가토급의 속도를 늦춰가며 이들의 속도에 맞춘 것과, 개전 후 포탑 폭발사고 - 무츠처럼 굉침하지는 않고 포탑 하나만 못 쓰게 되었기에 화력지원 등의 임무에는 의지만 있다면 투입 가능했다. 포탑 하나가 폭격으로 파손되고 속력도 제대로 못내는 워스파이트가 포격지원을 했던것이 그 예시 - 를 일으킨 이세급 2번함 휴가 이외 3척을 어중간한 항공전함으로 개장을 검토하고 이세급 2척에 대해서는 실제 실행한 행각을 보면 이들 구식 개장전함군을 결전전력이라는 명목하에 2차대전기까지도 호텔로만 써먹은 건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은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결전전력으로 써먹지도 못할 후소와 야마시로 2척은 1함대가 해대될 때까지 주력함대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세와 휴가 역시 항공전함 개장으로 자리를 비운 기간만 제외하면 역시 1함대가 해대될 때까지 결전 전력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소와 이세를 포기하고(혹은 중앙부 주포탑을 제거하고 기관강화로 고속화하거나)공고급 + 개장 나가토급 + 야마토급으로 2차대전기에는 훨씬 유용했을 고속전함 전력을 구성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일본 밀덕계조차 [[http://www.warbirds.jp/truth/torpedo4/06.html|#1]] [[http://www.warbirds.jp/truth/torpedo4/13.html|#2]] 가난한 일본 입장에서 '''후소,이세급 4척을 버릴 수 없었다'''라고 지적한다. 어차피 워싱턴 조약은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설령 조약이 없었더라도 당시 일본 경제력으로 88함대 계획으로 대표되는 신조전함군 건설은 불가능했으며 1930년대 기존 전함의 대개장 직전 조약상 권한이 보장되는 공고 대함 계획조차도 결국 취소되었고, 기존 전함군의 개장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내부의 대함거포주의자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으며 결국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탈퇴, 개함우월 - 대함거포 - 함대결전의 결정체, [[야마토급 전함]]이 탄생한다. 당시 일본의 공업력으로는 주포신 공급도 안 되는 주제에 야마토급 8척의 건조만도 꿈같은 일이었지만 그조차도 만족 못해 [[슈퍼 야마토급]]이 1942년 건조계획에 채택되나 [[미드웨이 해전]]이후 중단되고 그 함의 주포인 51cm연장포도 시제품이 만들어졌으나 개전이후 중단되었다. 같은 거함거포 미기공 전함인 [[몬태나급 전함]]과 비교하자면 A-150은 미드웨이 이후 시급히 항모전력을 재건해야하는 사정으로 취소된 반면 (그러니까 돈문제) 몬타나급은 돈문제가 아니라 조선소가 부족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탈락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몬타나급은 시험적 성격의 신형주포를 쓰는게 아닌 [[아이오와급 전함]]의 주포탑을 기존 세 기에서 네 기 장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차이가 있다. 일본은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만들어질 때 자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반발해서 기존 조약까지 모두 탈퇴했기 때문에 이론상으론 조약에 얽매이지 않고 제한없이 군함을 만들 수 있었는데,[* 다만 이건 국력이나 내부 상황등이 더 큰 변수로 작용한다. 계획한다고 다 만들어낼 수 있는게 아니란 건 독일의 [[H급 전함]]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본은 다른 나라들처럼 이미 있거나 만든 경력이 있는 포를 사용하는 전함 다수를 건조하는 게 아니라 갖가지 기술을 죄다 쏟아넣어 만든 신예 대구경 주포를 사용하는 전함을 건조하는 선택을 한 것도 개함우월주의 - 대함거포주의 -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한 좋은 증거. 영국과 미국도 18인치 주포를 시험해본 적 있으나, '''비싸고, 주포신의 마모가 격렬하고, 낙각이 좋지 않은'''이 포를 쓰는것을 보류하다 군축조약 이후 폐기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조약의 제한이 모두 사라지자 다시 18인치 주포(18"/47 Mark A)를 연구하였으며 1942년에는 시험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개발이 진행되었으며 이 주포에 사용할 초중량탄(Super Heavy Shell) 또한 개발되었다. [[http://www.navweaps.com/Weapons/WNUS_18-48_mk1.php]] 참조. 물론 해군의 관심이 항공기쪽으로 돌아가면서 이 주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종전 직전까지도 계획은 유지되었으나 시제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취소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