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함거포주의 (문단 편집) ==== 비겁한 변명들 ==== [[NHK]]가 2001년 다큐멘터리로 다룰 만큼[[https://m.youtube.com/watch?v=JRUmC-gSvtM|#]] 일본 해군의 거함거포주의는 이미 일본 내부에서도 통설로 굳어져 있으며 해당 다큐는 진주만의 성공 이후로도 거함거포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일본 내에서도 변명이 없는 것은 아니라 [[http://lite.blogos.com/article/110052/|'대함거포주의'라는 환상]] 문제는 거함거포주의나 함대결전사상, 점감요격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제로 '''상정대로만 일을 진행시키려는 자세와 미국에게 싸움을 건 것 자체'''[* 澄川浩「日本海軍と大艦巨砲主義」,『朋友』26巻4号, 2000年] 및 '''부정확한 근거에 기반하는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불과'''[* 森雅雄「イデオロギーとしての「大艦巨砲主義批判」」,『城西国際大学紀要』第21巻 第3号 国際人文学部,2012年] 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변명조차 이미 허구성이 지적된 영국, 미국과의 비율 차이[* 상술한 NHK의 다큐멘터리도 카사블랑카급 '''50척'''을 포함시킨다.]및 속도나 연료 수준에 머물 뿐이고, 항모 중시는 계획뿐이고 실천은 미흡했다는 전사총서의 지적, 항공전력 운용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유라 후지오의 지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지 못한다. 상기한 모리 마사오 준교수의 논문은 야마토가 '''미국이 전함을 투입한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던 이유는 '''연합함대 사령부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전함 6척 장갑순양함 6척이 연합함대의 전 전력이던 러일전쟁 시기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선두에 서는 순수한 전술지휘관이었지만, 해군의 규모가 커지면서 관료제화가 진행되고 군령부총장과 GF사령장관의 임무가 중복된 것이 문제일지언정 그것은 거함거포주의와는 상관없다는 주장인데 그럼 왜 '''실전엔 나가지도 않는''' 컨트롤 타워[* 상술한 대로 컨트롤 타워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인 연합함대 사령부가 1941년 12월 막 준공된 최신예 전함 야마토를 자신들의 기함으로 삼았는가? 야마토는 호텔로 쓰기 위해 만들어진 전함인가? 굳이 찾아본다면 과달카날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전함이 배치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함으로 공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대가 많자 자기가 직접 야마토를 타고가서 포격하겠다고 노발대발했다는 일화는 있다. 그러나 실제로 투입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 인간이 입으로만 떠드는 경우가 워낙 많다보니 정말로 전함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는지는 의문. 실전에 나가지 않고 컨트롤 타워 역할만 한 사례는 주적이었던 미 [[태평양 함대]]와 그 수장 니미츠도 비슷했지만, 물론 실전에 나서지 않는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최신예 전함이나 항모를 실전부대에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호텔로 써먹지는 않았다. 아카기를 기함으로 삼은 일 1항공함대 사령장관 나구모 주이치, 다이호와 즈이카쿠를 기함으로 삼은 일 1기동함대 사령장관 오자와 지사부로, 미주리를 기함으로 삼은 미 3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등의 위치는 후방의 컨트롤 타워가 아닌 그 밑의 일선 함대 현장지휘관이었고, 이들과 거의 동격인 미 5함대 사령관 [[레이몬드 스프루언스]]제독은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기함으로 사용했었다. 실전에 나가지 않는 컨트롤 타워라면 설령 이동 사령부가 필요하다고 해도 [[카토리급 연습순양함]]같은 물건이면 충분하고, 주력 전함전대 제1함대 사령장관을 GF사령장관이 겸임하고 '''최신예 전함'''을 준공 직후 기함으로 삼은 연합함대의 편제는 점감요격작전에 기반한 거함거포 함대결전이 벌어질 경우 이를 진두지휘하기 위한 체제로밖에 볼 수 없으며 이런 체제는 1944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덤으로 미일의 국력차를 그나마 이해하고는 있었고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의 한계 역시 주장했다는 지미파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드웨이 이전까지는 계속 본토에 남아 있다가 미드웨이의 대패로 입지가 위험해지자 트럭 정박지로 연합함대를 이동시킨다. 하다못해 1년 전까지 연합함대 기함이었던 나가토로 다시 기함을 옮기고 공방성능과 속도가 우위인 야마토를 실전에 투입할 수도 있었는데도 전함전력은 그저 보존, 후소급과 이세급은 어중간한 항공전함 개장. 일본 해군이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 및 점감요격작전, 덤으로 상층부의 보신주의에 젖어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이유가 과연 통용될 수 있었을까? 공고급을 필요한 임무에 투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 해군에서? 상기 논문은 개전 전 연합함대 사령부와 제1함대 사령부를 분리하는 것을 항공파 오자와 지사부로가 반대했다는 사례를 들고 있지만 정작 그 오자와는 개전 후 1기동함대 사령장관 때 전함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를 항모의 탱커로 세웠다. 1944년 2월 1함대 해대, 1기동함대 창설 전까지 전함을 결전 이외의 임무로 돌린 사례가 과연 존재하는가? ~~연료탱크랑 호텔로 잘 써먹었잖아~~ 다만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들과 귀중한 정비원들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일본 제국 또한 항공모함을 쉽사리 건조해 손실을 메꿀만한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미드웨이에서 일본이 상실한 항모와 인력은 1,2 항공전대였는데 대부분이 오랜기간 훈련하고 연습해온 숙련자들이었다. 해군이든 공군이든 한번 대량으로 잃으면 쉽게 메꿀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특히 거함거포주의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전함들은 건조에만 몇년이 걸리는 수준이고 그를 운용하는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조종사들과 관련 기술자들도 다를 바 없다. 보통 일본군의 초기 주력 항공모함들이 [[카가(항공모함)|전함]]이나 [[아카기(항공모함)|순양전함]]으로 만들어지던 배들을 개수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참고해 보자. 그러나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들이 박살난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전함들이 놀았기 때문이다. 연약한 항공모함은 전열 선두에 서 있고, 단단한 전함들은 수백 km는 떨어진 후방에 있었다. 미군은 박살난 요크타운을 응급수리만 한 후 미드웨이에 보낼 정도로 처절하게 노력했는데, 일본 전함들은 다들 뒤에서 항모전단이 박살나는 걸 구경이나 했다. 그런 전함들을 어떻게 변호해 줄 수 있겠는가. [[도고 헤이하치로]]의 승리 이래 [[연합함대]]는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타사파롱가 해전]] 당시 지휘관 다나카 라이조는 미국에서는 평가가 높은 반면 대승리를 거두고도 수송작전에 실패한 것과 기함을 선두가 아닌 중앙에 두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하단의 지휘관 평가 고위사관 대담에서도 '''용감하지 못하다'''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자들이 전함은 항모의 수 백 km 뒤에 세워뒀다. 그러나 지휘부 괴멸로 인한 혼란을 문제삼아 선두에 설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실전부대의 톱이라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실전에 아예 참여하지 않아 일본군 특유의 관료제에서 기인하는 지휘계통의 난맥으로 사령부의 의도가 일선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작전이 실패하는 문제가 계속 된다. 전함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항공모함과 항만 시설을 파괴해야 한다는 의도가 현장 지휘관인 나구모에게 전해지지 못한 [[진주만 공습]]부터, 수송로 방어를 위한 미 육군 수송선단 공격이 최우선사항이었다는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함대결전이라는 고정관념에 틀어박힌 쿠리타 타케오 이하 2함대 1유격부대에 납득시키지 못하고 애매하게 '전투함 격파 우선'을 허락한 [[레이테 만 해전]]까지 계속 이어졌고, 이런 문제의 시작이 '''주력함대에는 소모전을 강요한 채 자신은 쓸모도 없다는 전함에 틀어박혀 후방에서 노닥거리기만 한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라는 것. 참고: 역사와 인물 쇼와 56년 5월호 '태평양전쟁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2687/jinjiotu/jinji11.html|#]]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53343|#번역]] 그리고 [[높으신 분들]]이 몸을 사리는 와중에 써먹을 곳도 없을 전함군을 트럭 정박지 등지로 전진배치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부족한 연료와 물자는 문자 그대로 시궁창에 버려진다.[[http://blog.daum.net/mybrokenwing/501|#1]][[http://blog.daum.net/mybrokenwing/502|#2]] 링크한 블로그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하 연합함대 사령부가 항공모함의 상실을 두려워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상은 그 이상으로 엉망이라 '아부라가 나인다!' 발언의 무대인 1942년 12월경이면 과달카날 전역 소모전은 이미 결판이 난 시기로 점감요격작전에 가까운 축차투입의 결과 역으로 일본군이 점감요격을 당하는 꼴이 되어 류조 격침, 쇼카쿠 대파, 즈이호 중파, 히요 기관수리, 즈이카쿠와 준요 함재기 고갈로 항모전력은 진작 그로기 상태에 빠진 뒤 기지항공대와 수뢰전대를 축차투입하는 마당이었다. 야간전을 맡은 제 8함대의 중순양함들은 기함 초카이 중파, 아오바 대파, 후루타카/카코/키누가사 침몰로 전멸에 가깝게 박살났다. 이런 데도 [[높으신 분들]]은 자신들이 직접 끌고 나가야 하는 전함을 투입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http://m.blog.naver.com/imkcs0425/220818157889|#3]] 더 가관인데, 항공전력을 축차소모한 후 제공권을 상실한 해역에 전함을 투입하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당시 트럭 정박지의 저유능력과 연합함대가 동원 가능한 유조선 숫자로는 항공엄호를 받는 전함을 진격시켜 함포사격을 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나마 전력을 계속 굴리면서 계속해서 자기보다 약한 적을 제거하는 식의 공격적인 [[함대결전사상]]이라면 일본군 전함이 호텔로 불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단기 함대결전만을 상정해 극한까지 추구한 거함거포와 그 댓가로 남게 된 부족한 군수지원능력은 전쟁 기간 내내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았다. 사실은 그런 걸 따지기 전에 일본 전함들은 무지하게 약했다. 구축함한테 쫓겨 달아난 야마토와 나가토, 너무 느려터져서 함대에서 낙오된 무츠, 자기 주포로 자기 대공포좌를 박살낸 무사시를 보면 함대결전이 진짜로 벌어졌다 한들 제대로 싸울 것 같지도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