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함거포주의 (문단 편집) ==== 굴러라 항공모함 ==== >쇼카쿠급은 일본 항모세력의 중핵으로 전투력에서 당대 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을 압도했다...(중략)...1940년에 배치된 미쓰비시(三菱) [[A6M]]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 제로)’는 당시 영국과 미국의 함재 전투기를 성능 면에서 압도했으며, 태평양 전쟁 초반 일본 해군항공력 우위의 중심이었다 > - 전간기(戰間期) 영국, 미국, 일본의 항공모함 발전에 관한 비교분석. 박성용. 2011 일견 일본해군이 선진적인 항공전력 패러다임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위 서술의 실상은 서전기의 기습효과 및 연합군이 태평양전선에 배치했던 기종이 2선급([[F2A 버팔로]])이었다는 점에 힘입은 것에 불과하다. 잘 쳐줘야 1선에서 슬슬 물러나는 단계의 전투기 상대로 우위를 점한 걸 자랑한 것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해군, 육군이 모두 1선급 작전기를 투입하며 성능차이가 역전되고 개전시의 베테랑 탑승원의 소모와 맞물려 급속하게 소모율이 증가[*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했다는 지적을 간과한 독자연구에 불과하다. 당장 와일드캣과 제로센의 교환비만 1942년 5월부터 11월까지 111:129였다.[* Edward Young, "F4F Wildcat vs A6M Zero-sen: Pacific Theater 1942] 또한 '''세계최초의 탈조약형 항공모함'''으로서 해당 논문이 높이 평가하는 쇼카쿠급은 동시기의 에식스급보다 비행갑판 면적이 좁은데다 함교 위치문제로 운용 편의성이 구형 아카기, 카가보다 뒤떨어져 아카기를 대체하는 제1항공함대 기함으로 삼으려던 계획도 취소, 항해 안정성도 아카기나 소류보다 떨어졌다. 악천후시의 요동이 아카기의 3배, 소류의 1.5~2배였다는 기록이 있다. 해당 논문은 영국 함재기의 발전 정체도 지적했으며 분명 비합리적인 시스템과 영국 공군과의 갈등으로 자체적인 함재기 개발에 지장을 받은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국은 수입산 함재기를 도입하였기에 일본의 A6M이 도입된 시기와 영국에 [[F4F|그루먼 마틀렛]]이 도입된 시기는 1940년 7월로 동일하다. 이렇게 도입된 마틀렛이 함재기로 운용되는데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마틀렛의 첫 격추는 804 NAS에 의해서 1940년 12월 25일에 지상기지에서 발진한 기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http://www.fleetairarmarchive.net/aircraft/martletwildcat.htm|#]] 해당 링크에서 Loch Skail라고 적힌 장소는 Loch of Skaill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Orkney 섬의 지명이다. 이는 804 NAS가 Orkney 섬의 비행장에서 출격했다는 [[https://en.wikipedia.org/wiki/804_Naval_Air_Squadron|위키피디아의 설명]]과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에 HMS 아크로열은 1941년 11월에 격침될때까지 마틀렛을 운용하지 않았다. 아크로열이 일러스트리어스급이 배치되기 전까지는 가장 신형 항공모함이고 마틀렛으로 풀머를 대체하려고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소 의아한 부분이다. 그래도 일단 1941년까지는 [[호커 시 허리케인]]과 그루먼 마틀렛 같은 단엽단좌 전투기들과 복좌기인 [[페어리 풀머]]가 공존하는 형태였다. 극히 소수의 복엽기인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9월 기준으로 5기.)가 공존하고 있었지만 중요한것은 필요하다면 공군기를 개수한 물건과 수입 함재기까지 도입할 정도로 영국이 고성능 함재기를 도입하는데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좀 뒤의 이야기지만 F4U 콜세어를 처음으로 함상기로 운용한것도 영국 해군이었다. 그리고 복엽기로 따진다면 같은 시기 일본에서 41년 9월 준공된 최신형 상선개조항모 [[다이요(항공모함)|다이요]]는 함재기로 '''[[복엽기]]''' D1A2 96식 함상폭격기를 운용했다. 아무튼, 항공모함의 성능이 뒤떨어진다고 해도 항공을 중시한다면 어떻게든 싸울 수는 있다. 항공모함의 핵심은 우수한 함재기와, 그걸 제대로 다루는 조종사 및 정비병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공전력의 운용을 보면 항공을 중시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후진성이 드러난다. 육군이 중일전쟁을 치르며 항공대와 기지의 연계를 느슨하게 해 항공대가 기지를 옮겨다니며 작전할 수 있게 만든 일명 '공지분리제도'를 1937년에 전격 도입한 반면 해군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배는 멀쩡했던 즈이카쿠를 놀려두는 계기가 되었고, 해군이 비슷한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44년 3월, 실제 조직 개편은 마리아나의 패배 이후인 1944년 7월이었다.[*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을 치르며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투기 중점 체제를 확립했으며, 19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 방면의 항공 소모전을 겪은 후 육군은 전투기를 2.5배 가까이 늘리며 전투기:폭격기 비율을 3.5:1로 맞추었다. 그러나 해군은 중일전쟁은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조차 치열한 항공 소모전을 치르면서도 전훈을 반영하지 않아 전투기 중점 체제로 전환한 것은 '''1945년 들어서'''였다. [[http://navgunschl2.sakura.ne.jp/tenji/40_senkun_navair.html|#]] [[http://www.tsubasakai.org/Senshi_Kiji_283HP_000.htm|#]]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31186|#번역]] 상기 연보 해당 부분의 작성자인 유라 후지오(당시 2좌, 간부학교 전사교관실)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기고문, 상기 연보의 요약본에 가까운 내용이다. 그때는 이미 항공모함에 실을 항공전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해군의 항공주병론이라고 해봤자 함대결전의 보조전력으로서 [[폭격기무적론]] 수준에서 노는 후진적인 수준이었던 것이 실상. 확실한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격 일변도 사상에 의한 공격기/폭격기 중시는 폭격기무적론의 한계를 상대적으로 빨리 실감하고 전투기 위주로 전력을 재정비한 육군보다도 후진적이었으며 [[G4M|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폭격기]]를 [[A6M|성능은 부족하고 방어력도 부족한 전투기]]로 호위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고쳐지지 않았고 신형 전투기의 개발 및 양산조차 연합군은 고사하고 같은 일본 육군에게조차 뒤처진다. 육군이 [[Ki-61 히엔]]을 의욕적으로 도입하고 약 3,000여기를 생산, [[Ki-84 하야테]]를 1944년에 양산하기 시작해서 신뢰성은 문제가 많았지만 3,500여기를 생산한 반면 해군은 2,000마력급 고성능 전투기를 다 합쳐도 1,900기 남짓이며 그나마도 그중 1천기가 '''초기불량도 고치지 못하고 양산명령이 떨어진''' [[N1K-J 시덴]], 그나마 전투기와 요격기로 그럭저럭 성공적이었던 개량형 시덴 카이와 [[J2M 라이덴]]은 각각 4~500여기 남짓이 고작, 제로센의 후계기로 기대를 모았던 [[A7M 렛푸]]는 시대착오적인 ROC와 맞물리며 양산조차 되지 못한다. 반면 단순 계산으로도 같은 엔진을 쓰는 라이덴을 두 대 만들 수 있는 '''종이비행기''' [[G4M]] 1식육공은 2,200여기나 생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연합군과의 항공전력의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되고 이는 항공요원의 피해를 증가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결국 이런 저질 항공기로 능력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펼친 결과 서전기의 우세를 뒷받침했던 숙련 항공탑승원의 괴멸을 불러왔다.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항공모함이 '''너무 갑작스럽게''' 당하는 바람에 싸울 기회가 있었던 히류를 제외한 3척의 파일럿 손실은 크지 않다. 본격적으로 숙련 파일럿이 '''갈려나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벌이며, 물론 이 와중에도 전함전력은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을 기점으로 개전시의 숙련 탑승원은 사실상 소진되었고, 1943년 4월의 이(い)호 작전에서는 재건 중이던 3함대의 항모 항공대를 기지항공대로 투입해 소진시키는 악수까지 둔다. 해상 항법 및 항모 이착함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항모 항공대는 기지항공대보다 육성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결전만을 고려해 전력을 정비한 결과 장기 육성능력이 떨어지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적이었던 니미츠의 평가가 [[압권]]으로, '1급 항모 탑승원의 큰 손실은 일본 항모부대의 전력을 이제까지 이상으로 크게 저하시켰다'라고...(니미츠의 태평양전쟁사 일본어판 162p) 당연히 오자와의 3함대는 이 방침에 반발했지만, '''소위 항공주병론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오자와를 직접 만나 양해~~라고 쓰고 강요[[A라고 쓰고 B라고 읽는다|라고 읽는다]]~~를 받아낸다.[* 『戦史叢書39 大本営海軍部・連合艦隊4 第三段作戦前期』 118p] 1943년 10~11월의 로(ろ)호 작전에서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같은 일이 반복]]되고, 결국 1944년 2월 들어서야 체제를 정비할 수 있었던 항공전력의 숙련도 및 재건에도 엄청난 악영향을 끼쳐 그 결과가 [[필리핀 해 해전|칠면조 사냥]]. 그나마 배는 멀쩡하게 완성된 운류급 3척도 사실상 무용지물, 1944년 후반기부터 항공공격은 거의 대부분이 [[카미카제]]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