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문도 (문단 편집) === 역사 ===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위기감을 느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해군|대영제국 해군]]이 1885년 4월 15일부터 1887년 2월 27일까지 약 2년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거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거문도 점령 사건]]이다. 당시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군 제독 윌리엄 베일리-해밀턴[* William Baillie-Hamilton, 1803~1881]의 이름을 따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불렀으며 섬 사람들은 이 이름을 따 '보도 해밀도'라 불렀다고 한다. 거문도는 당시 열강이 주목할만한 위치에 있는 섬이었고 실제로 영국도 임대 의사를 밝히는 등 [[홍콩]]처럼 영국의 해외 조차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조차를 했다고 해도 홍콩과 달리 면적도 좁고 정주여건이 열악한 편이라 수용할 수 있는 인구 수가 많지 않아 여느 영국령 군소도서처럼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문도 주둔 당시 영국군 규모는 200명 내지 300명에서, 최대 700~800명까지 주둔했으며 군함도 5척내지 6척에서 최대 10척까지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거문리 뒷산 중턱에 옛 거문초등학교가 당시 영국군의 주둔지였다. [[영국 해군]]에 남아 있는 기록에 당시 일본인 상인이 [[가라유키상|여성 5명]]을 데려와 거문도 서도에서 [[유곽]](성매매 업소)을 운영했다고 한다. 1886년 6월 18일 저녁, 2척의 보트에 영국 병사 12명이 나눠 타고 이 유곽에 놀러 가다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다.[* 고도와 서도 사이는 약 500m 거리로, 두 섬을 잇는 다리는 1993년 개통되었다.] 수병 11명은 구사일생으로 헤엄쳐 나왔지만, 해병대원 피터 와드(Peter Ward) 일병은 익사했는데 수영이 미숙했던 데다 주머니에 유흥비로 쓸 은화를 잔뜩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고 영국 해군 기록에 적혀 있다. 그리고 영국군은 시신을 찾아준 조선인에게 사례하고, 다음날로 유곽을 폐쇄했다고 한다. 이외에 현지 여자([[무당]])를 짝사랑하다 죽은 [[영국]] [[수병]]이 있어서 젊은 여자가 빠져 죽으면 [[영국인]] 귀신이 잡아간 것이라는 [[괴담]]도 전해진다. 점령 도중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거문도에서만 9명의 수병이 사망했는데 이 중 7명의 시신은 본국으로 운구되었지만 2명이 거문도에 매장되었고, 이들의 묘지가 지금도 거문도에 남아 있다. 그리고 1903년에 거문도 인근을 지나가던 영국 함정에서 사망한 수병 1명도 여기에 묻혀 현재는 시신 3구, 무덤 2기가 남아 있다. 1887년(고종 24년)에 거문도의 상황을 보기 위해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보고에는 그 당시 9기의 영국군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 함의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리(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데일(Charles Dale)"로 새겨져 있다. [[십자가]]에는 "1903년 10월 3일 알비온 함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 주둔할 당시 섬 주민들에게 딱히 민폐를 끼치지 않고 호감도를 쌓았던 덕분인지 섬 주민들이 무덤 관리를 비교적 잘 해줬다. 이는 영국군이 점령할 당시 주민들을 동원할 때 임금을 주고 땅을 사용할 때에도 사용료를 지급하는 등 신사적인 방식으로 처리한 탓도 크다. [[주한영국대사관]]은 1982년 존 모건 주한영국대사가 처음 거문도를 방문, 영국군 묘지에 참배한 이후 지금까지 대사관에 부임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꼭 한 번정도는 여수와 거문도를 방문하고 있으며 거문중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0971896?sid=104|2005년]][[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7/09/0200000000AKR20150709129900054.HTML|2015년]][[http://www.jngoodnews.co.kr/48716|2023년]] 20세기 들어서 죽은 수병의 후손인지 친척인지가 찾아와서 이장하나 했는데, 꽃 한 송이 달랑 놓고 가서 섬사람들이 그 야박함을 탓하기도 했다고.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방한 당시 여수시는 거문도 방문을 부탁했지만 여왕의 일정이 바빠 오지 못했다고 한다.[* 일정상의 이유가 표면적이지만 아무리 영국군이 거문도 주민들에게 잘 해줬고, 주민들도 우호적이었다지만 불법 점거였다는 건 사실인지라 이에 대한 문제로 복잡해지니 어쩔 수 없이 방문을 생략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크림전쟁]] 당시인 [[1853년]]에 예프피미 푸차틴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 해군이 주민들과 다과회를 가졌다.[* 출처: [[굽시니스트]]-[[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 세계 속 한국 근대사.][* 이때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가 푸차틴 제독의 비서 자격으로 동행하었고 거문도를 비롯 동해안을 관찰하였고 이외의 해역과 여러나라를 관찰한 일지와 편지를 엮어 전함 팔라다라는 수기를 남겼다.] 19세기 영국 해군의 최대 잠재적국이자 국제정세상 라이벌이 러시아였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만, 당시 거문도 주민들은 러시아 해군을 싫어했다. 주민들과 친하게 지낸 영국군과 달리 러시아 해군은 행패를 자주 부렸다. 기록에 따르면 항상 술에 취해서 시비를 걸고 행패를 부렸다고.그 외에 프랑스의 경우 측량을 빌미로 지붕 위를 마구 뛰어다녀서 마찬가지로 인상이 안 좋았다. 네덜란드 해군도 들른적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크고 조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결론적으로 불법점거이긴 했지만 영국해군은 주민들에게 일을 시키고 급여를 주는 등 근대적으로 대했고 섬의 여성들에게 젠틀하게 대하고 가급적이면 농담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수병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대부분의 식민지들에서 [[혐성국|식민지 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식민지내에서의 갈라치기 분열 정책으로 악명을 떨친 영국의 이미지]]와는 완전 다른 면을 보였다. 그 동안 국가로부터 1원 한푼 받아 본적이 없던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해군 철군당시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한다. 현재 인터넷을 검색하면 당시 영국인들과 거문도 주민들의 기념사진을 볼 수 있다. 편안하게 앉아서 카메라를 응시하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호기심 어린 눈빛의 댕기머리 소년, 갓 쓴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 영국측 기록에는 마을 주민들은 매우 친절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나 위생적으론 좋지 못하고 전함으로 초대할수 없을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콜레라와 천연두가 심해서 같이 살기 불가능하므로 다 내보내야한다는 기록도 있다.] 무명국가의 섬사람들 답지않게 외국에 대한 궁금증, 세상 돌아가는 식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청소년층에는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배워 영국군과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한 이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담배를 주지 않으면 영어로 욕을 해서(...) 영국군이 난감해 했다고. 시간이 흐른 1960년대, 이들 중 일부가 90대~100대의 고령이 되어 정부의 진상조사에서 당시 역사의 산 증인으로 영어 회화나 영국 민요들을 증언해 주기도 했다. 영국군이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도 안 하고 노는 걸 보고 주민들이 왜 노냐고 물어봤더니 "[[일요일]]이라서(Sunday)"라고 대답했고, 이에 거문도 주민들도 노래하고 노는 문화를 '산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이전 조선시대에는 딱히 [[요일]]과 같은 개념은 없었고, 대신 달과 절기 중심으로 달력이 구성되었다. 민간에서는 딱히 휴일로 지정된 것이 없었지만 관원들의 경우 대개 매월 1일, 8일, 15일, 23일과 절기 때 쉬었다고 한다. 다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각 부서마다 비번과 휴일이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요일|칠요제]]가 도입된 것은 [[1895년]].] 수병들이 자주 쓸 법한 [[코크니]] 억양으로는 실제로 '산다이'처럼 들린다. 단, 순우리말이라는 일부 주장도 있다. [[영국]]이 점거할 만큼 해상의 요충지이다 보니 [[등대]]도 비교적 빨리 설치되었는데, 영국군이 철수한 후 거문도를 차지한 일본이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에 등대를 설치했다. 하지만 섬의 면적이 작아서인지 딱히 해군 기지로 활용되진 않았고 실상은 지리적 위치로만 의미가 있었다.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 해군]]도 중간 기항지 및 [[해안포]] 기지로만 활용했다. 일본의 경우 1880년대부터 거문도를 전진 어업 기지 및 해안초소로 활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