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문단 편집) === [[요나라]]의 건국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요나라 지도.png|width=100%]]}}}|| || 간접 세력권까지 포함한 요나라의 최대 강역(연두색) || [[907년]], [[태조(요)|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대통합했다. 그리고 해족과 [[습족]], [[실위]]를 정복하고 [[서하]], [[하서회골]], [[https://ko.m.wikipedia.org/wiki/%EC%A1%B0%EB%B3%B5_(%EB%AF%BC%EC%A1%B1)|조복]]을 복속시킨 다음 [[발해]]까지 멸망시킨 후 [[요나라]]를 건국했다. 요 건국 뒤에도 거란(키타이)이라는 이름은 요와 함께 공식적인 국호로 사용되었다. 최종적으로 야율아보기의 거란 제국은 그 영토가 몽골,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 만주에 이르렀다.[* 야율아보기의 아들이자 요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야율덕광]] 시기에 중원 내부로 쳐들어가 잠시 하남성 일대를 지배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야율덕광을 비롯한 거란족들이 중원의 토착민인 한족들을 상대로 너무나 잔인하고 난폭하게 굴어서, 이를 견디지 못한 한족들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켜 맞서는 바람에 결국 야율덕광과 거란족들은 요나라 본국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몽골 고원]]은 직할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의 형태였고 [[만주]] 역시 [[요동]], [[연해주]]와 [[발해]]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여진족]]과 [[발해유민]]의 반동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그래서 실효적인 지배력이 미친 영토만 따지면 영토가 매우 축소된다. 요나라 항목 참조. 다만 실효적인 지배장소들은 모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적합한 곳이었고 거란의 중심지와도 가까웠다. 외몽골 남부도 그나마 [[발해유민]]들이 있었던 옛 부여(만주 평원/동북 평원) 지역에 비하면 나름 직접통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한편 건국 이후에는 [[북송]]을 뜯어먹은 뒤 [[고려]]와 [[서하]]를 치나 형식적인 굴복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 그친다. 이후엔 거란의 여자, 매 등의 착취로 인해 분개한 여진족이 [[완안아골타]] 아래에 규합하여 요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결국 1125년 [[여진족|여진]]의 [[금나라]]와 [[북송]]의 협공을 받게 되는데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사로잡히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 때 금에 영향권 하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 있던 요나라의 잔존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 이주하여 [[서요]] 또는 [[카라 키타이]]를 건국했다. 그런데 요나라와 관련된 설명에서 의아한 것은 [[랴오허|요하]] 유역과 하북성 일대에서 웅거하던 요나라가 112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왕족인 [[야율대석]]이 거란족 유민들을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 [[서요]]를 건국하여 요나라를 이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천조제]] 이후 공중 분해된 것처럼 설명되곤 한다는 것. 서요가 쿠츨루크의 폭정과 뒤를 이은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무너진 뒤에도 일부 거란족의 유민들은 이란 동부까지 이주해 다시 요나라를 이어갔다. 얼마 안가서 또 다시 일 칸국에 의해 복속되었지만 이란, 즉 페르시아 남동부 [[케르만]] 주에 세웠던 거란족의 국가는 키르만 왕국 혹은 치얼만(중국어로 케르만/키르만을 칭함) 왕조라고 부르며, [[케르만#s-2.5|후서요(後西遼)]]라고도 표기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