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문단 편집) == 한국사와의 관계 == [[한국사]] 속 국가들과는 여러모로 깊은 악연을 자랑하는데, 거란이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8년 (서기 378년) 가을 9월의 기록으로, 이때 거란이 [[고구려]]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8개의 부락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 일부는 [[광개토대왕]]의 거란 토벌 후 고구려에 복속되어 그 번병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한 뒤에는 세력을 키워 그 후손인 [[발해]]와 함께 초반에는 같이 힘을 합쳐 당과 일전을 벌이는 등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했으나 본격적으로 세를 키운 이후에는 대립하기 시작한다. 급기야 거란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전성을 연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해버린다. 그 뒤 진행된 [[발해부흥운동]]을 계속 진압하며 그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해나간건 덤.[* 궁예는 거란을 적대하지 않고 오히려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요사에 보면 915년에 고려가 보검을 보낸 기록이 있고 918년에도 두 차례 거란에 사신을 보내는데 모두 궁예의 집권기였다.] 그리고 발해 정복을 끝낸 후에는 [[한반도]]까지 노려 [[여요전쟁]]을 대대적으로 일으켰고 고려의 선전으로 결국 막아내긴 했지만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한국 고대사 서적의 상당량이 이때 불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고려)|현종]]의 명으로 [[고려실록]]의 기초인 7대실록이 편찬되었고, [[고려사]]를 읽어봐도 혜종부터 목종까지는 거의 이전 [[삼국시대]] 급으로 분량이 없는데 현종부터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 이를 통해 여요전쟁 시기 거란의 공습으로 사료가 많이 소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7년에는 거란어에는 다른 몽골계 언어와 상이하게 한국어와 어원이 같은 단어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면서 거란어가 어떤 식으로든 실제 고구려어와 관련되었을 것을 가정하는 연구도 나오기도 했다. [[https://akademiai.com/doi/abs/10.1556/062.2017.70.2.4|해당연구]] [[고구려어]] 항목에서 고구려어와 고대 한국어 관련해 소개된 바 있는 [[알렉산더 보빈]] 교수의 연구이다. 거란인들이 고구려인들의 후손이라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거란어에서 몽골어, 중국어, 기타 퉁구스어나 만주어 등에서 유래하지 않은 기원이 불분명한 단어와 고대 한국어를 함께 분석해서 고구려어 단어를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 거란어 해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서 한자 어휘를 수용하는 것처럼 인접국끼리 문화 교류를 통해 어휘를 주고받는 [[언어동조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고구려에게 일부 복속되기도 했던 역사적 연원과도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하다. [[고려시대]] [[남경(고려)|남경]], 즉 현재의 [[서울특별시|서울]]은 [[여요전쟁]] 때 항복한 거란족 포로를 수용하던 곳이 있었다. 왕이 남경을 방문했을 때 왕을 맞이하는 거란인들이 거란 가무를 추고 거란 악기를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거란 포로들 10명 중 1명은 기술자들이었는데 고려 조정은 이들을 옷과 그릇을 만드는 일에 종사케 하여 고려의 제조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고 적혀 있다. 요나라가 멸망할 때 보주[* 오늘날의 [[의주군]].]가 고려의 영토가 되면서 그곳에 살던 요나라 주민들 다수가 고려로 귀순했다. 그 외에도 일부 거란인들이 고려로 망명해오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 거란인들뿐만 아니라 요나라에 살던 [[발해]]인, [[해족]], [[한족]], 일부 여진인들의 귀순이 이어졌다고 적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려로 동화되었는데 일부는 무관 등으로 등용되기도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자신의 살을 잘라 먹여 [[명종(고려)|명종]]에게 상을 받은 거란인 무관(산원동정[* 정8품에 해당하는 무관.]) 위초(尉貂)의 효행이 고려사 열전 효우편에 나온다. 또한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기병 중에는 항복한 거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에 귀부한 거란인들 중에는 고려군에 투신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고려)|고종]] 때 토벌된 뒤 고려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었다. 대요수국의 거란 유민들 중 8만 명이 몽골에 쫓겨 대거 고려로 침공해오기도 했는데 고려로 내려와서 각지에서 고려군과 싸우다가 패배한 끝에 강동성에 웅거했지만 고려-몽골 연합군에 포위되고 항복했다([[대요수국의 난]], [[강동성 전투]]). 어찌 보면 고려와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계기를 제공한 원흉인셈. 강동성에서 포로로 잡힌 8만의 거란 유민들은 [[고려]]에서 도살업을 하거나 갖바치, 고리, 광대 등의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았다. [[불교]]에 대한 신앙이 강한 국가에서 안 그래도 이런 일들은 천대받은 일들이었고, 거란은 역사적으로도 [[고려]]와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유민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리 만무했다. 이는 [[조선시대]]가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아서 [[백정]] 집단에 대한 뿌리깊은 차별로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