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신교 (문단 편집) == 특징 == >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주]]께 영광''' >---- >Quinque Sola(Five Solas): 다섯 솔라.[* Quinque는 [[라틴어]]로 '다섯'이란 뜻이고, Sola는 '오직'이다. 위의 오직이 붙는 다섯가지 모토를 뜻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기 모토. <오직 성경>은 성경(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총 66권으로 이루어진 개신교의 정경)이외 다른 책 혹은 경전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며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다른 수단이 아닌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뜻에 가깝다. 루터파 신학자 [[필리프 멜란히톤]]의 해설에 따르면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칭의받고, 오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sola gratia justificamus et sola fide justificamur")". <오직 그리스도>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이고, <오직 주께(하나님께) 영광>은,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는다는 내용이다.] >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 > 요도퀴스 판로덴스테인(Jodocus van Lodenstein, 1620–1677) 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국교화된 4세기 이래 지배층들이 교계로 편입되면서부터 이러한 비판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천여년 간 가운데 르네상스 시기만이 특별히 교회의 타락상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으며, [[면벌부]]나 [[사제(성직자)|사제]], [[수도원]], 신자들의 타락상 같은 것은 그 부작용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순수했던 신학을 되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고 이러한 움직임이 점점 커지면서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적법한 남계 후계자를 낳기 위한 재혼을 위해서[* 드라마의 영향으로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불같은 사랑에 빠져서 조강지처 [[아라곤의 캐서린]]을 버리고 이혼한 걸로 알지만, [[헨리 8세]]가 이혼을 시도한 건 [[앤 불린]]이 7세 때부터였고, 적법한 결혼에서 낳은 왕자가 없으면 [[튜더 왕조]]가 단절될 위기였기 때문이다. 이혼 전후로도 권력을 이용하거나 아부꾼들이 여자들을 상납하여 수많은 여자들을 후렸고 남자 사생아도 두었다.] 잉글랜드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기원은 [[발도파]]까지 기원이 올라가기도 하는데, 주요한 교리에서 지금의 개신교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개신교 내부에서도 위의 세력을 '[[종교 개혁]]의 불씨'라고 하지 '[[종교 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후스파]]와 [[발도파]]는 개신교로 편입되어 있다. 참고로 후스파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 교회로는 1918년에 루터교회와 칼뱅교회가 통합되어 생긴 체코 복음주의 형제회(Českobratrská církev evangelická)와 1920년 천주교 내 일부 개혁적인 성직자들이 천주교를 빠져나온 뒤 만든 체코슬로바키아 후스파 교회(Církev československá husitská)가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발도파는 발도 복음교회(Chiesa Evangelica Valdese)로 발전했다.] 마르틴 루터 이전 성서중심 신앙을 강조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또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중세 [[가톨릭]]에서 교회의 타락만으로 개신교가 설립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는 어느정도 설명은 되어도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 없다. 16세기 독일 지역의 면죄부 판매로 인하여 [[마르틴 루터]]와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처음 성공한 것이지 그 이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전례주의와 중앙집권을 비판하고 성경중심의 신앙을 강조한 움직임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교회에 억눌려 큰 세력을 형성하진 못했다. 초기 교부시대 이후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며[* 교황 연대기 저자 존 줄리어스 노위치는 르네상스 시대 15~16세기보다 11~12세기가 더 타락했다고 본다. 그 이전에도 중세 교회의 타락상은 여전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와 식자층의 증가로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조직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오로지 [[성경]]에 모든 가치관의 기준을 둔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주의, 칼뱅주의, 재세례파 등은 선구자 루터의 영향은 받았으나 각자 서로 다른 정체성과 다른 신학방향으로 분화되었으며 앞서 서술하다시피 그들은 가톨릭교회와의 종교갈등으로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만 재세례파 일부는 예외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에서 나란히 박해했다. 유니테리언도 마찬가지.] 현재는 [[성경]]에 대한 해석 차이 및 가톨릭 전통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루터교회]], [[장로회]], [[성공회]], [[감리회]], [[구세군]], [[성결교회]], [[침례회]] 등의 많은 교파로 갈라졌으나 이들은 서로를 이단시 하지 않는다. 교회 제도나 강조하는 교리가 다를 뿐이지 같은 개신교로 보는 것. 이 교파들은,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향해 형제 교회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다소 차이가 나는 침례교/장로회에서 루터회/성공회로 교회를 옮겨도 개종이라 하지 않지만,[* 극단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교회를 옮기는 것을 굳이 말리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교인들 사이에서 그 사람 신앙에 작지 않은 변화가 있나보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된다.]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기는 것을 [[개종]](=개신교에 대한 [[배교]])으로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회심이라고 한다. 돌아왔다는 뜻.] 초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마르틴 루터]] 쪽에서 가장 [[성경]]의 원형에 맞게 살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개신교파끼리의 [[성만찬]] 논쟁인데, [[마르틴 루터]]는 신약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을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살이라고 한 것,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피라고 한 것을 두고 '빵에 [[예수]]의 몸이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은 가톨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화체설(化體說)과는 차이가 있다. 빵은 빵일 뿐이며 그것이 신성한 육체로 변하지 않는 것이 큰 차이.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상징적인 것'으로, 후기로 갈수록 종교개혁자들은 루터파와 개혁주의 계통에서도 활발한 논쟁이 이어졌으며 루터 생전에도 루터파의 필리프 멜란히톤, 개혁주의에선 마르틴 부처 등이 둘 사이의 입장을 조절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한 세대 후 칼뱅주의에서는 둘 사이의 영적 임재설을 취한다. 현재까지도 루터주의와 칼뱅주의(개혁주의)의 차이점을 들자면 [[예정설]]과 더불어 [[성만찬]] 논쟁이다. 다만 현재에는 개신교 교파 내에서 그다지 심각한 신학적 차이점으로 여기진 않으며, 1973년 '로이엔부르그 합의서'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찬론은 같은 의미를 표현만 다르게 한 것이라는 데 합의하였다.[*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2017 참조] 삼성직[* [[주교]]-[[신부(종교)|사제]]-[[부제]]]을 인정하는 [[성공회]]까지도[* 고해성사가 필수가 아니라는 것 =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재자가 필요없다는 것을 의미] 만인사제설을 일부 받아들였고, 나머지 교파에서는 사제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지위는 목회를 이끄는 목회자에 해당하며, 교육자와 설교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칼뱅주의 장로회에서의 목사는 평신도인 장로와 같으며 설교하는 장로일 뿐이다. 장로와 감독(주교)제에 반대하는 회중교회에서는 회중(대중)에 뽑힌 자가 설교자를 할 정도로 성직자 계급을 강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수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회]]는 19세기 옥스퍼드 운동으로 [[수도회]]를 부활시켰다. [[서울주교좌성당]] 옆에 위치한 [[성가수녀회]]가 유명하다. 그 이외에도 성공회는 국내에 성 프란시스 수도회, 성 분도 수도회 등 다수의 수도회가 있다. 루터교회는 20세기 이후 [[수도회]]를 부활시켰다.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바실레아 슐링크가 바로 독일 루터회 자매회 수녀다.] 종교개혁자들은 소명(Vocatio)을 강조하여 세속적인 하찮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수도자]]와 [[성직자]]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신칭의]]에 따라 믿음 없는 수행과 수도행위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또한 당시의 [[수도원]]들이 대부분 타락하여[* 쉽게 생각해서 고려말 사찰과 조선말기 서원의 폐해를 생각해보면 된다. 면세혜택과 치외법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생긴 폐해다.] 특권 집단화 되었기 때문에 영국, 독일 북부와 북유럽 국가들은 상당수의 [[수도원]]들을 폐쇄 및 파괴했다. [[종교개혁]]시기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차이점을 일으킨 것은 루터가 재발견한 로마서의 '''[[이신칭의]]'''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성서의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핵심 문구[*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8(개역개정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개역개정판)]이며 반복되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의 통설은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도 정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슨 차이이냐 싶지만, 가톨릭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간 공로가 불가능하지만 유비적(analogous) 의미에서는 가능하다'고 보며 아우구스티누스 해석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이견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가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해석자를 자처하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우구스티누스 본인부터가 은총과 공로의 관계를 애매하게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펠라기우스 이단에 맞서 은총의 무상성을 강조했지만, 또한 마니교의 숙명적 세계관에 맞서 자유의지를 강도했는데, 이처럼 정반대되는 두 적대자들을 논박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은 복합적이고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많다.] 유비적 의미에서의 공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아무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많이 찾고, 또한 그로 인해 받은 은혜를 힘입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스스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기특하게 여기신다는 주장이다. 개신교에는 자신도 모르게 유비적 의미에서의 공로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으로 믿음의 선행을 하면 그만큼 천국의 상급이 쌓인다고 믿는 케이스를 들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에게 행위구원론이라 공격받는 것을 억울해 하듯이, 가톨릭에서 루터주의와 개신교의 이신칭의를 선행이 필요 없는 이상한 믿음이라 주장하는 것도 역시 무지에서 비롯된다. 루터에 따르면 신자들이 복음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과 별개로 율법에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선행은 그 결과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행위를 중요시하여 교회에서 정해 놓은 선행을 점수화하여 사소한 일에도 수백년 수천년, 교회에서 정한 악행에 대해선 천문학적 시간 동안 연옥에 갇히는 것으로 선전했고 그대신 교회에서 원하는 선행을 하면 (예: 헌금으로 받는 대사) 잠벌를 없애주는 걸로 선전해왔기 때문에 중세의 대중신심은 선행을 구원론의 대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중세시기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를 받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믿었고 별의별 악행을 다 저지르고 면죄부 사고 과거를 통째로 용서 받고 또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짓을 종교 개혁자들은 용납하지 못했다. 죄의 용서는 고해성사같은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해야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하여 세속적 윤리를 엄격하게 강조한다.[* 이 점에서 성리학과 통했기에 구한말 유림들이 긍정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개종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점 때문에 20세기 이후 북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경직성에 학을 때고 개신교를 멀리하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선행(good works)의 개념도 다르다. 루터가 강조한 선행이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한 성지순례, 고행, 금식 같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선행으로 교회 전통의 성경적 근거가 불확실한 선행은 인정하지 않았다. 농부처럼 가난하고 자식이나 부양 가족이 있는 자는 교회의 선행을 할 가망이 없고 사제 계급을 독점한 유력계층의 독점물로 여겨졌는데 루터와 칼뱅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한낱 농부가 가족들을 부양 하는 것이나 농부의 아내가 그리스도인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을 사제들의 행위보다 더 가치가 높은 선행으로 여겼다. 이처럼 중세 [[가톨릭]]의 선행 개념은 몇 가지 오류를 범하기 쉬웠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하는 선행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들이었고, 보속의 대가를 선행으로 여겼기에 그동안 여러성인들의 공덕이 축적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선행의 보고'를 교회에서 독점적으로 관리하며, 신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에 창설된 여러 특수 [[수도회]]가 서구사회에서 자선단체의 모태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교육을 하거나 의료활동을 하는 식으로 수도회 바깥에서 회칙에 따라 사도직 활동을 벌였다. 하늘나라에 가고는 싶으나 죄로 인한 보속은 받기 번거로운 귀족이나 부유한 평신도들이 이 [[수도회]]들을 돈으로 많이 후원하였는데, 선행처럼 어려운 일들을 사제계급에 위임하고, 때에 따라 선행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특히 [[흑사병]] 이후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가톨릭 교회에서 점점 손쉬운 보속수단[* 15세기 초반 [[교황청]] 분열시기를 마무리하며 황폐화된 로마 재개발을 위해 재개발 자금 확보를 위해 희년을 자주 선포하며 순례객들을 모았고 교회에선 면죄부를 팔고, 탁발수도자들은 성유물을 팔았다. 특별한 이벤트로만 팔던 면죄부는 그 영역을 넓혀가며 과거행위에 대한 면벌수단, 죽은자를 위한 면벌로 확대되었고 16세기 무렵엔 상설판매된다. [[95개조 반박문]]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도미니코회]] 요하네스 테첼은 아직 짓지도 않은 미래에 지을 죄까지 사면한다고 선전했다.]을 점차 제공하기 시작했고, 면죄부는 상설적으로 팔리면서 기존의 이러한 선행들조차도 하려하지 않고, 죄와 구원에 대한 것이 선행이라는 삯으로 사고 파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았다. [[마르틴 루터]]에 따르면 의인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산다. 이를 반대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곧 의인이다. 의인은 [[성경]]에 따르면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이 의인은 믿음과 구원의 약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지상에서 실천한다. 즉 [[마르틴 루터]]에게 구원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행과 구원이 약속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칭의 전에 예정과 소명이 논리적으로 필요했기에 [[예정설]] 논란을 내포했다. 그럼 '참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어떻게 구분 가능한가?'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바라는 대중들의 열망을 따르지 않았다.[* 과격 재세례파들이 선민의식을 가지고 고난받는 자가 선택된 백성이라면서 지배계급을 처단하는것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다. 특히 토마스 뮌처의 농민전쟁 때 농민들의 폭동에 대해서 비판하며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받으나 고난받는 이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며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그분만이 아신다"라며 지지를 거부했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만이 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성경]]에서 [[예수]]가 자신과 합한 자는 열매를 맺을 거라고 표현했기에, [[마르틴 루터]]는 좋은 행위로 인해 구원을 얻는 것도 구원을 얻는 데에 믿음 이외의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좋은 행위는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논리를 폈다.[* 다만 믿는다고 해서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복음을 믿음으로 의인으로 칭해지지만 여전히 율법 아래선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가톨릭처럼 때에 따라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회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루터 신학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의인인 동시에 완전히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율법적 죄를 부정하는 것은 초기교부 시대부터나 종교개혁시기에도 비판받은 이단 논리였고, 17세기 이후 이전의 종교개혁 신앙의 선배들의 열정에 비하면 현저하게 영성이 내려간 상태에서 등따습고 배불러지자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라며 느슨한 신앙을 유지했었고 서로간에 죄, 회개, 구원 이라는 말을 교인들에게 말하는 자체가 금기시된 시절이 있었는데 이는 종교편의적 발상(불편한 것은 외면하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라며 역시 크게 비판받은 태도다.] 하지만 후에 이것을 가지고 [[장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전 종교개혁가 선배들의 노고를 집대성하여 정리하며 답을 제시했다.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지 여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에게 그 모습을 참된 믿음으로 발현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칼뱅의 예정설은 역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자유의지]]의 영향을 거의 온전히 받아들였다. 이는 자유의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유의지 중에 선한 것이 있으나 균형추가 악에 크게 기울어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루터는 자유의지는 악으로 완전히 타락하여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견해. 일단 칼뱅의 예정설은 한 마디로 잘라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이론이고 그 갈래도 매우 다양하며 칼뱅 이후에도 보충적인 해석을 덧붙인 신학자들이 많았다. 칼뱅 본인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구원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오직 구원이 예정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장 칼뱅]] 본인마저도 모질게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할 정도. 이에 반대해서 아르미니우스나 존 웨슬리, 드와이트 요크 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다'[* 일부 [[침례회]]에서도 받아들였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를 이단시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피해를 보고 있는 교회들도 많다고 한다.] 성화(聖化, 믿음 이후 올바르게 사는 삶), 최종적인 구원이란 여정을 말하였다.[* 성화가 성경에 없다는 소리가 있는데 중생(重生, 거듭남)과 성화 (거듭남 후의 삶)이 성경에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단순 발음 드립이면 할말이 없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주장한 것들을 바탕으로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 신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 문구 자체는 일단 모든 개신교에서 틀리지는 않았으나 개신교의 구원론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불 속에 다이빙한다고 협박하여 강제개종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신칭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종교개혁 시기엔 전 유럽이 기독교 신자였고, 딱히 잘못된 믿음이라 생각하는 가톨릭에 맞서거나 신앙을 지키려는 측면이 강했지, 비종교인을 세뇌하여 개종하려는 시도는 18세기 유럽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문구는 사도시절에만 해당한다고 보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 칼뱅조차 선교는 기독교 국가의 영역이지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보았다. 루터주의나 칼뱅주의나 기존 가톨릭 신자나 사제를 대상으로 개혁신앙으로 변모하길 바란 것이지, 지평선 넘어 이교도들을 찾아다니는 걸 생각하지 않았다. 출처: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그 위험 한 사상의 역사》] 이 때문에 장로교회/개혁교회보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헤른후터(모라비아 형제회), 감리회, 침례회 등에서 선교 활동을 먼저 시작했으며, 공식적으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793년 자 인도에 파송된 영국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로 보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부가 설명이 필요한데, [[장로회]]가 다수이고,[* 한국 개신교 전체 신자 약 1000만 가운데 65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장로회 내부에선 에큐메니컬 문제로 갈라진 합동, 통합 양대교단이 절대 다수이고 여러 교단이 있지만 군소교단의 세는 미미하며 10여개 교단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장로회를 뺀 나머지 가운데도 [[감리회]](약 150만)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종파가 생각보다 다양하지는 않다. 이는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장로회와 감리회 외에 침례회와 성결교회, 하나님의 성회(순복음교회) 등이 있다. 유럽에서 세가 강한 개신교의 맏형인 [[루터교회]]는 1950년대에 제일 늦게 들어온 데다 교회 수도 압도적으로 적어서 듣보잡 취급이고, 세계 개신교 최대 종파인 [[성공회]]도 역시 교세가 약하다. 루터교회와 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이신칭의와 유일구원설을 믿고 [[마리아]]를 공경하지만 [[몽소승천]], 무염시태, 평생동정 등의 교리들은 거부하며[* 하지만 [[성공회]] 내 일부 고교회적 성향을 가진 이들 중 이 교리들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교구나 교회에서도 개인의 선택을 존중한다.], 마리아가 지상의 신자들을 대신해 중보기도를 한다거나 중보자 노릇을 한다는 가톨릭 교리에는 반대한다.[* 이것 또한 [[성공회]]는 제외이다. 특히나 한국 성공회에서는 80년대 까지만 해도 미사 중 고죄부분에서 성모와 성인들, 그리고 주교/사제와 지상의 교우들에게 전구를 청하는 부분이 있었고, 지금은 이 부분이 집전자가 교우들을 향하여 성호를 그으며 사죄를 선언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나, 성모송이나 여러 부분에서 아직 전구가 남아있다.] 그러나 예배 형태나 건축, 의복 등 하드웨어상으로는 가톨릭과 유사하며 특히 [[대한성공회]]는 고교회파여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하드웨어 상의 이질감이 루터교회나 성공회가 아무래도 따로 노는 듯 보이는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 단 [[루터교회]]는 좀 애매한게, 일단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등 다른 개신교 교단 신자들이 보기에는 생소하거나 어색한 요소들이 많기에 좀 다르게 보는 시선도 있지만, 한국 개신교의 표준 성경인 개역개정판을 자주 쓰고, 예배에 쓰이는 용어도 타 교단과 크게 차이가 안나며, 다섯 솔라 등을 강조하는 등 개신교적인 정체성에 꽤 뚜렷하기 때문에 크게 이질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또한, [[대한성공회]]와는 다르게 예배당을 가리키는 말도 '교회', 목회자도 '목사'이고, 교회 인테리어도 몆몆 교회에 십자고상이 있는 정도를 제외하면 장로회, 감리회 등과 대단히 차이가 큰 건 아니기도 하며, 한국의 루터회는 신학적으로 대체로 중도적이기도 해서, 예장 고신 등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단들과도 은근 교류가 있기도 하고 진보적인 교단들과도 교류가 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진보적 색체가 강한 [[대한성공회]]보다는 이질감이 적다.] 이 양대 종파가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헐뜯고 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개신교 종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이 잦은 상황에서 문제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밝힐 때에만 개신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특정 교회 및 인물의 잘못이 전 종파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것은 옳지 않으나, 또한 절대 다수의 [[장로회]]가 다른 개신교 교단들과 다른 점을 아는 신자들도 적다. [[장로회]]는 개교회중심주의라 교회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성공회]]와 일부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공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개신교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단에서도 일단 이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이단]]취급하는 교회도 있으며(물론 에큐메니컬 진영은 가톨릭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단'으로 낙인찍기보다는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더 비판적인 교단(반 에큐메니컬)은 잘못된 전통을 넘어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선포된[* 그것도 [[교황무류성]]으로 선포된 교리이기 때문. 이 교리에 반발하여 가톨릭에서 분리된 교파가 [[복고 가톨릭교회]].] 가톨릭의 마리아론 교리를 심각하게 보며 "이단도 아니라 이제 이교다" 라며 더더욱 부정적으로 본다. 이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른 장애물까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마리아]] 문서의 개신교 입장 문단 참고. 가톨릭의 개신교 비판 중에는 '''개신교가 [[가톨릭]]과는 달리 교리 해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가톨릭]]은 [[교황]]과 [[교황청]]이 중심인 반면, 개신교는 읽는 이에 따라 [[성경]]의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파가 갈리게 된다. 단일한 권위체계가 존재하는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해석의 권위가 없어 분열이 필연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성서해석과 역사를 잘 모르는 의견일 뿐이다. 일단 성서 해석에 있어서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도 나왔는데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한 신학박사과정을 나온 마르틴 루터는 물론이고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장 칼뱅조차도 가톨릭 교회의 기존 성서해석이 명백히 틀리지 않은 이상 기존 해석을 인정했다. 당시 개혁자들의 성서 해석 문제 제기는 중세후기 [[스콜라 철학]]의 연구와 방법론은 물론, 14세기부터 제기된 인문주의의 연구성과를 이어 받은 것이고 구체적으로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나 에라스무스 등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 연구가 뒷받침된 것이지 당시에도 이미 여러 연구성과로 인하여 이의제기가 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 가톨릭 교회의 정본 [[불가타]]판의 오역과 필사본 전수시 오류나 첨삭과 그로 인한 잘못된 해석을 발견하여 원전연구를 재시도한 것이지 개인이 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비난에 불과하다.[* 국내 꽤 많은 교단이 목사를 신격 우상화하고 목사가 멋대로 성서를 해석하고 설교하는 일이 있지만, 이는 타락한 일부가 저지르는 일이지 전 세계적인 현상은 아니다.] 역사적으론 가톨릭 교회가 로마시대부터 현재까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비록 전승상은 그렇다고 주장하나) 것은 대단히 무리이며 착각이다. '''로마교회는 이미 종교개혁 이전 동방교회와 격렬한 신학적 논쟁끝에 분열했었다.''' 기독교의 역사 초기만 좁게봐서도 교리상으로만 봐도 로마시대부터 영지주의, 도나투스파[* 북아프리카에 농촌과 산악지역에서 로마 국교화 이전 배교자 출신 주교들을 거부하며 로마 국교화로 타락한 기독교를 거부한 세력.], 펠라기우스 주의[* 브리튼섬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은혜 없이 선행으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 일시적으로는 로마에서 인기를 끌었다.] 등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한때 로마 교황조차 펠라기우스의 의견에 찬성하기도 하는 등 로마의 의견이 항상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니케아 공의회부터 아리우스파 단성론 등 초기 신학적 논쟁은 로마가 아닌 동방에서 주도했으며 훗날 동서 교회의 분열인 [[필리오케 문제]]와 성화상 문제 등 주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 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동서 분열 이후 서방교회에서 조차 교부시대 때부터 다양한 의견들이 나뉘었고,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개신교에서도 인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대교부들의 입장이 통설로 정리되어 온 과정이 교회의 역사이다. 그리고 발도파처럼 개신교의 선구자급으로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을 주장하던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으면 열심히 이단으로 사냥하여 태워 박멸한것이 성공한것이지[* 아우구스티누스 시절에도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선고했고, 이단은 두들겨 패서라도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는게 교부들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단일화된 목소리가 항상 옳았다 주장하는것은 별개다.], 가톨릭 교회가 교황아래 한치의 의문점도 없이 2천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아니며, 꼭 옳은 점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개신교 출현 이전 공의회주의 출현, 19세기 교황 무류성 교리 선포 이후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며 일갈한 영국의 가톨릭 신자역사학자 액턴 경의 경우처럼 가톨릭 내부에서도 절대 단일한 목소리만 나오는것은 아니다.] 개신교에서는 오히려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초기 기독교와 멀어진 근본 원인이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해석권한을 교황에 있다하여 (평신도에게 성경 금지, 성서 번역금지 등) 지식을 독점하다 인문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권력있는 이나 많은 이가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문주의 모토인 ''ad fontes''(근본으로 돌아감)을 통하여 일반사제는 물론 평신도까지 성경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명백히 잘못된 가톨릭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통해, '전통에 대한 맹종이 올바른 신앙인가'가 종교개혁시기 논제였고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의 권위로 대체'''하려는것이 당시 종교개혁 주의자들의 목표였다. 한국 개신교에 수백개의 교파들이 있음을 근거로 들면서 개신교의 분열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는 수백개의 교단 중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으며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는 교단은 일반적으로 10-20개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로회]]가 60% 이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장로회 내부에서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부르크 신앙고백 등을 공통의 믿음으로 선언하는 교단만 같은 장로회 교단으로 인정하지 수백개의 교단이 나뉘어 삼국지 찍듯이 세력 다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타교로 볼지언정[* 특히 반에큐메니컬 계열 보수 교단. 교회일치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컬 교단들은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본다.] 같은 개신교인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은 서로를 타교로 보지 않으며, 교회제도(감독제 등), 강조하는 교리(침례 등)등이 조금씩 다를 뿐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본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나뉘어서 반목 타령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이라면 신도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간의 교류도 흔하게 이루어지고 이들 교단 중에서 소속 교회를 옮기는 것도 '''그냥 거기가 집에서 가까워서'''라고 말하는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정도로 서로간의 거리감은 크지 않다. [[장로회]]나 [[침례회]]와는 다르게, 전통적인 전례에 부정적이지 않은 (혹은 긍정적인) [[루터교회]]와 [[성공회]]도 타교로 보지 않는다.[* 장로회에서 루터회를 아예 타교처럼 봤다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같이 준비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성공회는 특히 보수적인 교파에서 미묘하게 보는데, 이는 [[대한성공회]]가 유독 보편교회(가톨릭)주의를 강조하는 고교회파(앵글로-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그렇다. 원래 [[감리회]]도 전통적인 전례에 부정적이지 않은 교파이다. 해외에 나가면 성호를 긋는 감리교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장로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례적인 요소를 많이 없엤다. 애초에 한국에 감리회를 처음 전파한 [[헨리 아펜젤러]]부터가 본래 [[장로회]]에서 [[감리회]]로 이적한 인물이다.] 이들 교파는 모두 '개신교'라는 이름 아래 연합하고 있다. 개신교 교파의 분열상 자체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고 미국이나 영국, 서북유럽에서도 한참 때 일어났던 현상이다.[* 같은 교파라고 해서 교회 분위기나 목사의 신학 스타일이 다를수도 있고 다른 교파 교회랑 더 같을 수도 있다. 개교회주의가 강하다.] 당장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일된 중앙권위가 없음을 아쉬워 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중앙집권화된 역사 이래 수많은 오류와 범죄들을 보면 꼭 좋은 것만으로 보기 어려우며 개신교의 교회정치 시스템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나치시대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과 나치정권의 정교협약에 침묵을 지킬 것을 명령 받았으나[* 교황청이 나치에 동조한 이유에는 무신론자 공산주의자인 소련을 나치가 공격한 것도 있다. 나치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적의 적은 친구니까.] 개신교는 일원화된 구조가 아니라서 나치가 조직한 '독일인 교회'에 반발한 목사들이 고백교회를 만들어 반 나치 투쟁을 벌였고, 우리나라에선 선교사와 모국 교단 교회 내부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 끝에 신념에 따라 참배를 거부한 인물들이 현재까지 존경 받으나[* 아이러니한 점으로, 독일에서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나치에 저항했지만, 반대로 조선에서는 신정통주의 신학이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로마와 일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순응하여 일찌감치 모두 신사참배에 굴복했고 저항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작용이 불거진 면도 없진 않으나 개신교는 의외로 기본이 '''민주주의와 자치주의'''이다. 장로제와 회중제가 바로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고 개교회주의는 루터의 (지방자치적) 지역교회론에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가톨릭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의를 깡그리 부정하면서 나온 요소들이며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윗 문단처럼 일부 반가톨릭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교회론을 일종의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보편성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하기 쉬운 구조이다.[* [[성공회]]의 교회론에 대해 에큐메니즘 차원에서 긍정적인 입장을 피력한 [[한스 큉]]도 이러한 점을 우려하였다.]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부터가 종교개혁 시기를 통해 나온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헌법에 정교분리를 못 박아놓은 나라에서조차도 개신교는 내셔널리즘과 결합하는 경우가 잦고, 영국과 북유럽에서는 아예 '''국교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특정한 문화를 배경으로 자생하여 유독 특정 지역에서만 교세가 강한 교파들은 역사적으로 민족주의/국가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가 흔히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틀:잉글랜드의 성공회 교구|잉글랜드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독일의 루터회 등을 들 수 있다. 현재의 성공회와 루터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각 나라마다 관구 또는 교구를 두고 있고, 각 관구가 상하관계 없이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이런 우려가 어느정도 해소된 상황이다. 비교적 최근에 분파되어 한 지역에서만 꽤 큰 교세를 유지하는 교파라면 다른 교파, 더 나아가 기독교 교단들의 연합 기구와의 교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도 한국 개신교 교회들은 국내에 몇 개의 대표성을 갖는 교회 연합 기구를 통해 소통하는 것 외에도 미국의 대형 개신교 교단들을 위주로 현재에도 끊임없이 국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개신교 신학의 세계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번창한 교세를 바탕으로 아시아 개신교 선교의 최전선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무감 역시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아시아 선교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교단이 지역마다, 시대마다 지속적으로 탄생하더라도 교리가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하기보다는 기본적인 원칙과 오피니언 리더들 간의 교류에 기반한 느슨한 국제적 연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각 교단의 이견으로 인한 불화가 [[보편교회]] 측의 부정적인 전망과는 달리 무한히 확장되지는 않고 전 지구적 개신교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경쟁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균형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의 [[금육재|금육]] 금식[* 금요일엔 금식, 사순절 기간엔 고기는 물론 버터 금지, 양고기를 먹을 땐 양젖금지 등 계율을 어길 경우 중죄로 거의 지킬 수 없는 보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스스로 발가벗겨서 회초리로 피가 나도록 매질하고 성벽 몇 바퀴 며칠동안 돌기, 강제 성지순례 등]을 비판한 역사에, 오로지 성경만을 신조로 삼는 교리상 신약성서 바울의 서신에서 유대인의 율법 중에 음식에 대한 것은 지킬 이유가 없다고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금육, 금식을 아예 안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사순절에 금식기도회를 가진다든지, 성금요일에 예수의 수난을 기리며 금육, 금식을 하는 식. 다만 가톨릭과 다른 점은 금육, 금식을 신자의 의무로 규정, 요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개신교는 전 세계 종교들을 통틀어서 [[시크교]]와 함께 육식에 매우 관대한 종교이기도 하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개신교 문화권은 고기 요리가 발달한 경우가 많다.[* 애초에 [[종교개혁]] 3인방 중 하나인 [[울리히 츠빙글리]]가 금육일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은 사람들을 옹호한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영국 요리|영국과]] [[북유럽]].[* [[독일]]도 마찬가지다. [[루터교회]]권인 [[니더작센 요리]]랑 [[가톨릭]]권에 속하는 [[라인란트 요리]]를 비교해 보자.] 그리고 [[장 칼뱅]]의 청부(淸富)사상이나 막스 베버의 영향으로 다른 종교 입장에서는 현세적, 속물적이라고 까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교파마다 다르니 무조건적인 일반화는 하지 말자. 참고로 칼뱅은 루터를 우습게 여겼을 정도의 금욕주의자였다. 스위스 목사로 있을 때도 금욕주의를 설파했던 전력이 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기호품에 대해선 종파마다 달라서 애매하지만 가급적 피하는 종파가 많다. 특히 미국이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 [[성공회]]를 제외한]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술과 담배를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럽 개신교도 완전금지까지는 아니나 술,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다. 일례로 [[덴마크]]를 제외한 북유럽 국가들은 술을 아무데서나 살 수 없는데 이는 국교인 루터교회의 영향이다.] 구한말 시절 외국 선교사가 보기에 지나치게 술 담배 노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 거듭난 삶을 보여주길 바라는 측면에서 술담배를 금지했던 것이고 현재에는 이전보단 많이 풀렸다. 적어도 예나 지금이나 술 담배 한다고 지옥 간다고 하는 목사는 없다. [[예수|예수님]]도 [[최후의 만찬|와인을 즐기셨는데]] 이 분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소릴 하는 사람은 없다. 성서에서는 술취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했지만 술 마시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다.[* 담배를 금지할 근거는 없다. 담배는 신구약 시대에서 수천년이 지나서야 신대륙에서 들어온 것이니까 당연히 성서에 안 나온다. 다만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바울 서간의 내용(고전6:19)을 들어서 금주, 금연을 옹호하는 해석 역시 존재한다.] 즉 성서대로라면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는 건 괜찮지만 실제 그렇게 양 조절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주령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설령 술 마시고 취했다고 한들 그런 걸로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목사도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섬김을 가르치셨지 죄를 짓지 말아야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애초에 복음 자체가 '''자신이 매우 악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만 장로회에선 목사들은 술 담배 금지 규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 구약에서 나실인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따라서 성직자에게도 더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 이 술과 관련된 문제는 지중해권 지역과 북유럽의 음식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식수를 마실 때 [[수인성 전염병]]을 방지하고 그 지역 식수에 [[석회수|석회질이 많아]] 이 역시 건강에 악영향을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을 만들어 마시는 것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시기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래서 이들 사회에서 술을 끊는다는 건 '''밥 숟가락을 놓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예수]]가 성찬에서 빵과 함께 [[와인]]을 거론한 것도 당시 식생활에서 와인은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김치]]조차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식탁에서 빠지면 곤란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사회에서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체로 '''그냥 술에 취해서 살았고''' 술 취한 삶을 매일 뉘우치는게 일상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홍차]]와 [[커피]]가 이 지역에 도입되고 나서야 유럽, 지중해 주민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제정신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큰 과장은 없었던 셈이다. 이 시점이 되어서야 사회의 필요악이었던 술이 '''그냥 악'''이 되어버렸고 [[이슬람교]] 역시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게 가능해진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강력한 금주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성서]]는 [[꾸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오래된 경전이기 때문에 꾸란 만큼 강한 금주의 메시지를 전달하긴 어려웠지만 술에 대한 관점이나 우려에 대한 취지는 그 당시부터 단지 대체재를 찾지 못했을 뿐인 별로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적절한 대처 수준이었으니 현대 기독교에서 술이나 기타 정신활동에 영향을 주는 물질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성서적 취지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톨릭]] 역시 개신교만큼 강하게 신도들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 몸에 좋지 않은 이런 것들에 대해 어지간하면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진보, 중도 성향의 교단은 성(性)에 관한 교리가 (이혼, 피임, 낙태를 절대 금지하는 등의) 가톨릭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다만 동성애의 경우, 진보 교단은 가톨릭보다 유연하고(일부 교단에서는 동성애자가 목회자/성직자가 되는 것도 허용할 정도), 보수 교단은 가톨릭보다도 빡빡하다.(예를 들면, 동성애자가 평신도로 입교하는 것도 금지.)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동성 간 육체관계 및 동성결혼은 단호히 반대하나, 동성애자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엄한 인간이므로, 사랑과 친절로서 대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개신교의 보수교단의 입장도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 모두 동성애자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죄인이라고 해서 미워해선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르침이고 죄인을 정죄할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인간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정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것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대하는 모든 기독교 종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고 이 원칙에서 동성애 문제가 예외가 되지도 않는다. 개신교 교단 중 대부분은 성호긋기, 십자고상,[* 루터회의 경우도 십자고상이 아닌 십자가 틀만 부착하는 사례가 있다.] 제단에 촛불 놓는 것,[* 장식으로 양초만 놓는 경우도 있지만, 보수교단을 제외하고 절기에 맞게 초를 켜는 경우도 꽤 많다.(대림절, 부활절 등)] 성만찬의 성변화 등을 가톨릭의 잔재 혹은 비성경적인 행위라 하여 배척한다.[* 성변화는 성공회를 제외하고 부인하며 성공회의 경우 딱히 말리진 않는다.][* 개신교적 관점에 따르면 가톨릭 전례 역시 성서의 진짜 율법서인 [[레위기]]를 기준으로 보면 딱히 근본이 있다고 내세울만한 정통성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와 [[사도]]들도 [[세례]], [[성찬식]], [[주기도문]] 같은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의례를 제외하면 복잡한 절차 같은 것을 만들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 역시 전례가 무시되는 근거가 된다.] 또한 가톨릭의 교황 중심적 교회관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멸칭인 Papist(교황주의자, 교황숭배자)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 상술했듯 대체로 전통이나 인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반면,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외관적인 면에서 당대의 최첨단 기술과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아예 [[자유민주주의]]([[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포함)[* 중세 가톨릭의 신정정치, 권위주의를 타파하려고 나온 것이 개신교다. 특히 [[청교도]]들의 사상이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주는 자양분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국, 미국 개신교의 일부 근본주의 또라이들 때문에 개신교가 자유민주주의를 배척하는 것처럼 보이지, 원래 프로테스탄드 정신은 정치적 권위주의는 배격하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695|참고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문화적 자유주의를 배격하는 부분은 어쩔 수 없다쳐도. 반면에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그리 긍정하는 입장이 아니었으며,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일부 극보수 [[전통 가톨릭]]인은 여전히 자유민주주의를 '현대주의의 오류'라며 매우 안좋게 본다.]나 [[산업 혁명]] 등을 비롯한 현대 문명이 만들어지는 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443321&code=11171396&sid1=spe|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즉, 철저하게 'Semper Reformanda' 정신에 의거하여 종교개혁자의 의견이라도 현대 기준에서 성경에 어긋난다고 증명되면 비판하고 폐할 정도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라 볼 수 있다. 개신교의 원리 중 만인사제설과 성경자유해석은 교파의 분열과 이단의 난립을 낳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탈권위주의적 교회론과 후기 자유주의 신학의 씨앗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오직 성경은 현대 근본주의의 씨앗이 되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현대 개신교계가 [[개신교신학|성경신학]], [[성서비평학]] 등 성경에 대해서 굉장히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세계에서 건물 크기가 가장 작은 교회는 [[http://www.webtionary.co.kr/qfinder/print_content.jsp?idx=154096&kind=goods&whereValue=%ED%81%AC%EB%A1%9C%EC%8A%A4+%EC%95%84%EC%9D%BC%EB%9E%9C%EB%93%9C+%EC%B1%84%ED%94%8C|크로스 아일랜드 채플]].[*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교회(이를 개신교에서는 초교파 교회라고 부른다.)이며, 전례적으로는 [[성공회]]를 따른다고 한다.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가톨릭]] [[성당]]은 [[텍사스]]에 있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당'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