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개성시 (문단 편집) === 개성상인(송상)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송상)]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500년간 작동하며 '''원래부터 상업이 융성'''했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차별을 받아 상업이 융성했다는 주장은 두문동 72현처럼 17세기 이후 지어낸 야사이다.[* 이 외에도 [[평양]]에 대한 차별은 실제로는 신분 차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여기 살던 사람들은 신분이 아주 천한 건 아니고 평범한데 더 높은 사람에게 정치적으로 밀린 것이다. 명문가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면 잘 어울렸고, 명문가 출신조차 각 지역의 역사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신분 의식이 남은 [[일제강점기]]에도 평안도 출신이지만 [[손기정]] 등이 유명했다.] 개성 [[송상]](松商)은 [[한강]]과 [[한양|한성]]의 시전을 본거지로 한 경강(京江)상인들과 양대 상인 세력으로 대립했다. 덕분에 개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상업의 거점으로 남게 되었다. 물산이 모이는 곳치고는 문화가 융성하지 않은 곳은 없었으니 [[서경덕]], [[한석봉]] 등의 문사들과 명신 [[황희(조선)|황희]]도 개성에서 나왔다. 개성상인들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개성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혹자는 조선의 [[유태인]]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풍은 지금도 남아있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사람들은 깍쟁이"'''(말이나 행동이 얄밉도록 약삭빠른 사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독한 면모 덕분에, [[일제강점기]] 시절 상계를 잠식해오는 일본 자금에 맞서 거의 유일하게 상권을 지킨 것도 개성의 상인들이었다는 후문.[* 개성시민들부터 개성사람의 물건이 아니면 소비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성상인들이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덕목은 '''신용과 정성'''이었다. 특히 남에게 돈을 과도하게 꾸어서 사업을 할 경우 차후 신용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남에게서 돈을 꾸지 않는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했다. 이는 개성상인의 후예로 알려진 현대의 기업가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개성상인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진 [[대한민국]]의 기업으로는 [[OCI]]와 [[아모레퍼시픽]] 등이 손꼽힌다. [[OCI]]와 [[아모레퍼시픽]]을 각각 창업한 송암 [[이회림]] OCI 창업주와 장원 [[서성환(기업인)|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모두 개성 출신이다. 이회림 창업주는 실제 고향도 개성이었다.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이회림 창업주는 개성 출신이라는 인연을 앞세워 1975년 당시 시가 1억 원 상당의 주식을 [[송도중학교(인천)|송도중]], [[송도고등학교|송도고]]에 헌납하며 학교 재단인 학교법인 송도학원의 이사를 맡았고 1982년에는 결국 학교재단을 통째로 인수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현재까지도 송도학원은 [[OCI]]가 운영하고 있다. 평안도 출신인 서성환 창업주는 개성에서 내려와 사업을 했던 어머니로부터 사업을 배워 개성에서 사업을 시작해 훗날 남한에서 사업을 번창시킨 이들로 유명하다. 이 덕에 현재도 [[OCI]]와 [[아모레퍼시픽]]은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탄탄한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