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혁(농구) (문단 편집) === 프로 선수 시절 === [[파일:수원 삼성 강혁 1999-2000 시즌.jpg]] 1999년, [[서울 삼성 썬더스]]에 드래프트 전체 5번으로 지명되면서 입단했다. 당시에는 외국인 선수를 두 명 쓰던 시절이었고, 또 주전 가드로는 [[주희정]]도 있었기 때문에 주로 [[식스맨]]으로 뛰었지만, 상당한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삼성의 프로농구 첫 우승인 2000-01 시즌에도 주전 멤버는 아니었지만,[* 당시 주전은 [[주희정]] - [[문경은]] - [[이규섭]] - [[아티머스 맥클래리]]-무스타파 호프였다. 주희정이 시즌 MVP, 맥클레리가 외국인 선수 MVP, 이규섭이 신인상을 수상했다.] 겨우 프로 2년차였던 강혁은 시즌 중엔 평균 17분 정도, 챔피언결정전부터는 25분 이상을 뛰는 키 식스맨으로 활약하며 '''2000-01 시즌 최우수 후보선수상'''을 수상했다. 팀을 우승으로 이끈 뒤,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 [[상무 농구단]]에서 [[신기성]], [[현주엽]], [[길도익]], [[정훈종]] 등과 함께 [[2001-02 농구대잔치]] 우승과 [[2002-03 농구대잔치]] 준우승을 경험한 뒤 2003-04 시즌 팀에 복귀했다. [[파일:/image/109/2006/04/25/200604252022411300_1.jpg|width=400]] 가장 빛나던 시기는 2005-06 시즌. 정규시즌 2위로 올라온 삼성은 4강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를 3승으로 일축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비스를 만나 4전 전승으로 우승하며, '''PO 7전 전승 우승'''의 대기록을 작성한다. 이 해 챔프전에서 [[올루미데 오예데지]]와 [[서장훈]] 더블 포스트의 골밑 공략을 대비하던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울산 모비스 피버스]]의 허를 찌르고, [[네이트 존슨]]과의 2:2 [[픽앤롤]] 플레이로 팀 우승의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KBL 챔피언결정전|챔피언결정전]] 당시 성적은 '''평균 17.3 득점 6.5 어시스트'''. 이 때의 맹활약 덕분에 '''2005-06 시즌 챔피언 결정전 [[MVP]]'''로 선정되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식스맨(교체선수)으로 활약하다가 주축가드로 도약하는데 성공한 선수이다. 최고의 식스맨으로 꼽혔음에도 교체선수의 특성상 별 조명을 받지 못했었지만, 챔프전의 활약이 겹치면서 강혁은 선수생활 말미에 주목받기 시작. 특유의 승부욕, 근면성이 비로소 팬들에게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2007년에는 [[KBL 올스타전|남자프로농구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자유투]] 성공률은 리그 최상위권이며 앞서 2005-06 챔프전에서 언급된 것처럼, 2:2 플레이에 매우 능하다. 수비력도 출중해서 2003-04 시즌부터 4시즌 연속 수비 5걸에 선정되기도 했다. 특히 스틸에 매우 뛰어나다. 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서울)|종합운동장역]] 안내 방송을 맡는 등 삼성 썬더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그러나 2010-11 시즌, 삼성이 6강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로 탈락하자 감독 교체 등 대대적인 팀 개편이 있었는데, 강혁이 그 대상이 되었다. 오래도록 뛴 팀을 떠나 [[이병석(농구)|이병석]], [[김태형(농구)|김태형]]과의 2:1 [[트레이드]]를 통해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이적했다. 이때 은퇴까지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65&aid=0000057965|전자랜드맨 거듭난 강혁 “팀이 버리기 전까진 배신은 없다”]] 10년 넘게 [[서울 삼성 썬더스|한 팀]]에서 꾸준히 생활한 강혁에게 있어서 선수 생활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임을 짐작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삼성에게 있어서는 '''아주 뼈아픈 [[실수]]'''였다. 삼성은 가드진의 부실화로 14연패라는 수모 끝에 꼴찌로 시즌을 마감한 반면에[* 특히 연패도 연패고 꼴찌도 꼴찌지만, 삼성은 [[안준호]]의 재임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포스트시즌에 빠진 적이 없었고, 게다가 02-03 시즌을 시작으로 10-11 시즌까지 장장 9시즌 내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팀이었고, 특히 안준호의 재임 기간 동안에는 우승 1번, 준우승 2번을 거두는 등 강한 팀이었다. 이런 강팀을 [[김상준(농구)|김상준]]은 상당히 형편없는 지도력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망쳐놓았으니...], 강혁을 얻은 전자랜드는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이게 다 돌상준 때문이야]]!!~~ 군입대로 빠진 [[정영삼]]의 공백을 말끔히 메우고, [[후배]]들을 잘 가르쳐 주면서도 간혹 가다가 20점 이상의 득점을 올리면서 매우 좋은 활약을 보였다. 워낙 한 팀에 오랫동안 있었던 까닭인지 팀을 옮기고 나서도 삼성과의 경기를 했을 때 넘어지거나 하는 경우 [[룸메이트]]였던 [[이시준]]을 비롯해서 삼성 선수들이 먼저 달려와 일으켜주거나 걱정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데뷔 이후 '''[[은퇴]]할 때까지 한 번도 [[플레이오프]]에 결석한 적이 없다'''. 강혁이 입단한 이후 '''삼성이 딱 한 번[* 첫 우승 다음 해.]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강혁은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있었다'''. 심지어 삼성은 강혁을 떠나보내고 맞이한 첫 시즌에는 아예 꼴찌로 추락해 버렸다. 당시 [[이정석]]의 백업 포인트 가드가 아쉬운 와중[* 개중 나은 수준의 [[이시준]]은 아예 리딩력이 떨어졌다. 애초에 이시준의 플레이스타일은 슈팅 가드에 가깝다.]에도 굳이 남아도는 포워드를 받아오는 농알못스런 [[트레이드]]를 하는 바람에 이정석은 부상으로 몇 경기 뛰지도 못하고 시즌 아웃을 당하자 속절없이 무너져 버렸다. [[김상준(농구)|준비 없는 감독]]이 팀을 운영하면 어떤 꼴이 되는가를 아주 퍼펙트하게 보여준 사례. 참고로, 입단 이후 은퇴를 생각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계속 플레이오프에 개근한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 몇 년 전까진 [[김승현(농구)|김승현]]과 함께 유이한 선수였으나, 김승현이 오랫동안 모종의 사건으로 몇 년 간 리그를 못 뛰는 바람에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2012-13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식스맨]]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하면서 전자랜드를 정규시즌 3위로 올려놓는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친정팀 삼성을 3:0으로 누르고 4강 PO에 올랐지만, 그 과정에서 그만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전자랜드가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모비스]]에게 패한 4강 PO 3차전에서 은퇴식을 가지고 공식 은퇴했다. 사실 원래 이렇게 급작스럽게 은퇴식을 하는 경우는 드문 편인데, 시즌 중에 모교인 삼일공고로부터 코치직을 제안 받았고,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부상재활 기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전자랜드측에서는 만류하였다고 한다. 은퇴 당시 이미 나이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긴 하였다. 특히 마지막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정병국(농구)|정병국]]~~의 패스를 받아 클린 3점을 성공시키면서 더 감동을 자아냈다. 그것도 상대가 던지라고 길을 열어준 게 아니라 [[양동근(농구)|양동근]]이 끝까지 수비를 펼치고 있던 상황에서 성공시킨 것이라 더 감동이 있는 마지막 슛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