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창성 (문단 편집) === 군장성 시절 === 1927년 9월 1일 [[경기도]] 포천군(現 경기도 [[포천시]])에서 출생하였으며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육군사관학교]] 8기 출신인데 동기생들 중에는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오치성]], [[김동근(1930)|김동근]], [[차규헌]][* [[후배]]인 전두환에게 빌붙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등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사람이 많았으나 그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5사단장, [[중앙정보부]] 차장보, 육군보안사령관 등 군 내 요직을 거쳤으며 육군보안사령관 시절 [[김복동]]의 장성 진급 누락 계획을 알고 이를 막는데 기여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박정희의 명령으로 [[이기택]][* 이기택 의원이 4.19 세대의 대표 정치인으로 민주화 세력의 거센 반발을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알려졌다.], [[조윤형]], [[김상현(1935)|김상현]], [[윤길중]], [[박한상(1922)|박한상]], [[이세규]][* 이세규 의원은 군에서도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명단에서 제외 하려고 했으나 [[박정희]]는 이세규가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684부대|실미도 부대]]에 관련된 것을 폭로 했다는 이유로 거절 했고 어쩔수 없이 체포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근호]], [[이종남(1919)|이종남]], [[김경인]], [[김녹영]], [[김한수(1935)|김한수]], [[나석호]], [[홍영기(1918)|홍영기]], [[조연하]], [[최형우(정치인)|최형우]], [[류갑종]], [[박종률]] 등 15명의 체포 명단을 받은 자리에서 민심의 반발이 우려된다며 인원을 줄일 것을 설득하는 등 온건파에 가까웠다. [[파일:attachment/kcs17.jpg|align=center&width=300]] 1973년 4월 육군보안사령관으로서 박정희의 명령에 의하여 [[윤필용 사건]]을 수사하게 되었다. 10월 유신 직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각하(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고 형님(이후락)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강창성은 처음에 육군사관학교 동기인 윤필용을 살려 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는 더욱 분노하였고 결국 윤필용과 주변 사람들을 수사하게 되었다. [[쿠데타]] 혐의가 나오지 않자 군무 이탈 등의 다른 죄를 적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 [[노태우]] 등이 조직한 군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존재를 알게 되고 하나회를 뿌리뽑으려고 하였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73년 8월 보안사 휘발유 유용사건[* 보안사에서 보급받은 휘발유 300드럼을 민간인에 팔아먹었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보안사령관 시절 그의 [[부관]]이었던 [[이준(군인)|이준]] [[소령]]도 하나회의 견제를 받아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 때까지 주로 [[강원도]] 오지에서 근무했다.] 윤필용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인물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으며 1976년 예비역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하게 되었다. 예편 이후 해운항만청장을 역임했던 강창성은 1980년 3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초대로 국정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전두환이 집권욕을 드러내자 "이번만은 [[국민]]들이 자유롭게 뽑은 민간 정치인에게 정부를 이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며 비판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전두환은 1980년 여름 강창성을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여 고문을 하고 나서 해운항만청장 시절 [[뇌물]] 수수 혐의를 씌워 [[징역]] 3년을 때린 뒤 [[서울남부교도소|영등포교도소]]에 보내 버렸다.[* 해당 사건은 2023년 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 결정이 내려졌다.[[https://www.yna.co.kr/view/AKR20230216124400004|#]]] 투옥 2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일반 재소자들과 함께 하루 4시간씩 [[교도소]]에서 실시한 재소자 특별순화교육(소위 [[삼청교육대]])으로 수난을 겪은 강창성은 [[체중]]이 70kg대에서 40kg대까지 빠진데다 [[당뇨병]]까지 얻었다고 한다. 출옥 이후 강창성은 [[일본]] 유학을 하고 잠시 [[명지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명지대학교 일본문제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일본/한국의 군벌 정치>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10101025181154(1).jpg]] 왼쪽에서부터 [[노무현]], [[김종완(정치인)|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이기택]], [[김원기(1937)|김원기]], [[이부영]] 순이며 오른쪽 끝이 강창성 의원이다. 위의 보안사령관 시절 사진과 비교하면 거의 얼굴과 체구가 반쪽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