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준만 (문단 편집) == 언론 개혁 운동: 『인물과 사상』과 안티 조선 == > 두말할 필요없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중되어야 하며, 언론은 그 다양한 의견을 공정하게 전해야 한다. 설사 언론이 특정 의견을 부각시킨다 해도, 다른 의견을 매도해서는 안 된다. 설사 언론이 다른 의견을 매도한다 해도, 그건 기사가 아닌 사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시늉조차 내지 않은 채 아예 노골적인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 > 강준만, 『조선일보 공화국』 > 똘레랑스(관용)가 엥똘레랑스(불관용)까지 용인해 버리면 자기모순에 빠진다. >---- > 홍세화, 『왜 조선일보인가』 > 10년 전부터 감을 잡은 게 있어요. '안티조선 운동'은 박세길이 쓴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마지막 챕터에 조선일보를 끼워 넣고 '이것은 친일의 잔재'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이었다는 걸요. 진보 논객이란 사람들이 운동권 시절부터 배워서 익힌 '[[내러티브]]'를 새로운 적을 찾아 끼워 넣는 방식으로 계속 활용한 거죠. >---- > 노정태, 2020년 신동아 인터뷰 '문재인은 반동적, 노무현은 역동적' 중 강준만이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저술한 저널룩 『[[인물]]과 [[이데올로기|사상]]』은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를 모토로 삼고 있는 시사/문화비평 전문 계간지였다. '저널룩(Journalook)'이란 '''저널과 책의 성격을 결합한 대안매체'''를 의미했다. [[책]]은 현실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현장성이 부족하고 출간이 오래 걸린다. 기존의 [[언론]]은 일간지 중심이라서 신속성을 중시한다는 한계가 있다. 저널룩은 여러 가지 이슈를 동시에 짧게 다루는 잡지식 구성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출간시기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기간행물은 아니며, 1인 저작물이란 단행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크지와도 다른 것이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사방팔방 논쟁을 걸기 시작하면서부터 강준만의 존재감은 더욱 도드라졌다. 『김대중 죽이기』에서 시도했던 지식인 [[실명]] 비판을 여기서 다시 선보였고, 또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드문 '[[구어체]] 글쓰기'를 전파하였다. 그 동안 금기시되던 영역에 과감한 칼질을 해서 공론의 영역으로 끌고 나왔다. 한편으론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공격적 성향으로 '무뢰배', '또라이'라는 별명도 얻었으며, 그의 주장에 동감을 표한 사람들은 '준마니스트'라는 경멸 섞인 표현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준만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인물과 사상』의 지면을 내주었다. 1997년 총 네 권이 출간된 『인물과 사상』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열기를 주도하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인물과 사상』의 인기는 1998년 5월 월간지 『인물과 사상』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주필은 강준만. 가감 없이 신랄하게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비판하면서도, 이에 반박하는 견해를 자유롭게 게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진정한 '논의의 장'을 마련하였다. [[고종석]], 김규항, 박홍규, [[변희재]], [[유시민]], [[진중권]], [[홍세화]] 등 '[[논객]]'이라고 불리는 지식인들 중 적지 않은 수의 담론이 『인물과 사상』을 통해 소개되었고, 이들의 입지를 다지는 기반이 되었다.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겁내지 않는 매체'를 찾다가 『인물과 사상』에 '극우 파시스트 연구'를 게재하기 시작했고, 이 원고는 1998년 11월에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개마고원)로 출간됐다. 강준만은 안티조선운동의 출발선을 끊은 사람이기도 하다.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주류 언론은 [[종북몰이]]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특히 조선일보의 월간지 『[[월간조선]]』이 1998년 11월호에서 [[최장집]] 사건을 터트린 게 논란이 됐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최장집 교수가 쓴 논문을 악의적으로 발췌하여 마치 [[6.25 전쟁]]을 북한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것처럼 보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색깔론 시비를 붙인 건 조선일보 기자 이한우였다. 강준만은 이한우에 대해 "스승의 등에 칼을 꽂았다"며 비판했다. 그러자 이한우는 강준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 광경을 보고 참을 수 없던 [[홍세화]]는 같은 문구를 자신의 칼럼에 똑같이 반복하며 [[에밀 졸라]]를 인용해 "나를 고소하라"고 외쳤다. 강준만과 홍세화는 조선일보가 언론권력을 악용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조선일보 제 몫 찾아주기' 운동을 제안했고, 이 부름에 시민사회가 화답하면서 '안티 조선 운동'의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한윤형]]의 『안티조선운동사』를 참고] 그러나 [[노정태]]는 『논객시대』에서 강준만이 구상했던 언론 개혁이 실제 안티 조선 운동과는 입장 차가 있었다고 한다. 강준만은 어디까지나 언론학자였고, 『인물과 사상』과 같은 개혁적인 잡지를 만들어서 언론 시장에서 싸워 볼 마음만을 먹고 있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스티커를 제작해서 뿌리는 것과 같은 대중 운동을 염두에 두고 있진 않았기 때문에 안티 조선 운동에 대해선 전폭적인 지지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강준만의 입장은 양면적이었다. 한편 [[진중권]]과는 '옥석 논쟁' 이후 갈라섰다. 결과적으로 정기 구독자 10만 이상을 목표로 했던 월간 『인물과 사상』은 1만을 넘어선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을 치달았고, 저널룩 『인물과 사상』은 2005년에 폐간한다. '강준만식 글쓰기'는 저널룩보다는 인터넷에 더욱 적합한 양식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실시간으로 새로운 글이 올라오고 그에 따라 피드백이 오갔다. 사람들은 강준만에게 배운 논리를 웹에서 재생산했고 더 이상 강준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처럼 안티 조선 운동의 선구자인 강준만이지만 [[조선일보]]는 대인배스럽게 강준만을 양심적 진보 지식인의 대표격으로 존중해주며 그 발언 하나 하나에 무게를 담아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572100019|지면에]]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8/2020040800128.html|옮겨주고 있다.]] 사실 조선일보가 대인배스럽다기 보다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처럼 강준만이 민주당계 진영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에 지면에 실어주는 것이라 보는게 타당하다. 조국 사태 이후 진중권 등 여타 진보 정치인들의 정부 비판을 그대로 옮겨 싣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 조국 사태는 상당수 진보 정치인들, 그리고 진보 성향의 논객들로 하여금 현 정부와 여당에서 이탈하게끔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다. 적패청산을 구호로 내걸고 출범했던 정권이 자신들이 증오하며 비난해 온 기성 구세대 정권들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내로남불 정부라는 악명도 이때부터 부각되기 시작했고 진보 성향의 지식인, 인사들의 현 정권 비판 사설이나 시론이 한때 대립관계에 있었던 보수 언론에 올려지기 시작한 것 또한 이 사건 이후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사건에서 검찰과 사법권력의 횡포가 드러나 역설적으로 [[검찰개혁]], [[사법개혁]]이 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며, 검찰과 법원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면서 보수 진영으로 전향한 진보 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의견이 늘어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