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원용 (문단 편집) == 생애 == [Youtube(1ych37jmHb8)] 1985년 4월 22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31년 [[개신교]]인이 된다. 개신교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는 당연히 심하였고, 그의 조모는 슬퍼하셨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농촌 계몽운동에 감화되어 '농민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신념을 안고 [[만주]] 용정으로 건너갔다. 당시 1935년에는 만주의 [[북간도]] 용정의 용정중학으로 진학, [[윤동주]], [[문익환]]을 만나 인연을 맺었고,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가하였다. 1944년에는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8.15 광복]] 이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중도파 정치인들과 같은 노선을 걸어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경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진보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조봉암]]과 생전에 친분이 두터웠으나, 기본적으로 반공보수 성향인 강원용은 조봉암의 지지 요구는 거절하였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 반 독재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1980년대 [[5공]]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는 당시 [[신군부]]에 호의적으로 돌아서면서 일명 5공 시대의 변절자 '''[[윤보선|윤]][[천관우|천]][[지학순|지]]강''' 중 '''강'''으로 꼽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노태우 정부]] 땐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사노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박노해]] 석방 탄원서에 제일 먼저 서명할 정도로 인권 문제에 있어선 나름 진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말년에는 [[참여정부]]의 일부 정책이나 녹록지 않은 친일 청산 작업 등을 비판해 [[친노]] 진영이나 [[한겨레신문]] 등과 충돌하기도 했다. 2006년 8월 17일, [[노환]]으로 소천하였다. 향년 89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