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원도/역사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include(틀:조선의 행정구역)] [[조선시대]]부터는 [[충청도]]에 있던 원주, [[평창]] 등이 포함되었으며, 1395년 치소를 춘천에서 원주로 옮기고 도명을 강릉의 '''강''', 원주의 '''원'''에서 따 [[8도]]제 중 하나인 강원도로 바꾸었다. 허나 [[태백산맥|지리적 이유]] 로 인해 강원도 내에서 명목상 좌우도제로 영서는 강원우도, 영동은 강원좌도로 나뉘었다.[* 현재도 도청이 위치한 춘천 못지않게 강릉이 영동 지역 공공행정 기관의 지역 거점을 계속 담당하고 있다. 지금도 영서 지역과 영동 지역의 각종 행정 시스템을 이원화하는 게 효율적인데, 교통이 극악이었던 조선 시대는 당연했을 것이다. 결국 통일신라와 고려 대부분 시기, [[23부제]]를 고려하면 영서와 영동지역을 조선 시대에 합쳐선 안 되었다는 중론이 나온다.] 이때부터 강원도의 [[관찰사]] [[감영]]이 원주에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강원도의 명칭은 1395년 6월 13일에 제정된 이후 1895년까지 무려 10여차례의 변경과 복원이 되풀이 되었는데, 그것은 불효⋅[[패륜]]⋅[[역모]] 등 도리에 어긋나는 중죄인이 어떤 지방에서 생겼을 때, 그 죄인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등급까지 강등하여 [[광역시|대도호부]]나 [[도시|부]]를 군⋅현으로 강등하였고, 강등된 지역의 글자를 도명에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례로, [[현종(조선)|현종]] 7년(1666) 강릉에서 박귀남이라는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자 그의 부인이 딸과 사위와 공모하고 그를 생매장한 일이 발생하여 강릉대도호부를 강릉현으로 강등하였으며, 강원도를 강릉 대신 [[양양군|양양]]을 붙여 '''원양도'''라 하였다. 그러다가 9년 후인 [[숙종(조선)|숙종]] 1년(1675)에 다시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또한, [[영조]] 5년(1729)에는 원주에서 역모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원주 대신 [[춘천]]을 붙여 '''강춘도'''로 하였다가 3년 후에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정조(조선)|정조]] 6년(1782)에는 대역죄로 죽음을 당한 사람이 강릉에 거주해 있어 강릉을 빼고, 다시 춘천을 붙여 '''원춘도'''라고 하였다가 9년 후인 정조 15년(1791)에 다시 강원도로 복칭되었다. 1895년에는 전국 행정구역을 [[23부제]] 337군으로 정비할 때 강원도를 폐하고 2부(춘천부, 강릉부)로 개편되면서 원주는 충주부에 속해 있는 군이 되었고, 1896년 다시 23부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로 분할했을 때 강원감영을 원주가 아닌 춘천에 두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춘천으로 옮겨진 이유 중 하나는 춘천이 구한말에는 영서 지역 중 가장 인구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발생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국가 변란 등 유사시에 대비한 피난처를 물색하였는데, 그 중에서 춘천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고 이에 따라 춘천을 [[임시수도|부수도]] 격인 유수부로 격상시키고, 수도 [[한양]]의 동쪽 봉의산 자락에 [[춘천이궁]]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춘천이궁]]은 1888년(고종 25) 초대 춘천유수 김기석이 공사를 시작하여 1890년(고종 27) 2대 춘천유수 민두호가 완공하였다. 완공 후 고종이 실제로 이곳에 행차한 적은 없었지만, 이궁이 춘천에 위치함으로써 1896년에 원주에 있던 강원감영 대신 [[춘천이궁]]이 강원관찰부청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춘천이궁]]은 지금도 강원도청(강원도 춘천시 봉의동 1)으로서 명목을 이어가고 있다. 1903년 함경남도 안변군 학포사 지역을 흡곡군에 흡수하였다. 1908년 김화군이 금성군에 [[https://terms.naver.com/|흡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