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성우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입단 첫 해 주전 포수 [[김선일(야구)|김선일]]의 백업 포수로 뛰면서 규정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포수로서 .303의 타율을 기록할 정도로 존재감을 뽐냈다. 그 해 [[199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어 비록 경기에 출전은 못했지만 롯데의 두 번째 우승의 순간을 함께 했다. 이듬해인 1993년은 [[방위병|방위복무]]와 병행하느라 출전 경기수도 대폭 줄었고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전역 후 맞이한 1994년은 김선일과 포수 마스크를 번갈아 쓰며 사실상의 주전 포수로 활약. 타격에서도 시즌 내내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하며 당시 롯데가 주전 선수들의 상당수가 방위복무로 인해 전력이 크게 약해졌음에도 시즌 중 나름 4강 싸움도 하면서 선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즌 타율은 .286로 마무리했다. 1995년은 [[상무 피닉스 야구단|상무]]에서 제대하고 전해 롯데에 입단한 동갑내기 포수 [[임수혁]]이 [[마해영]]과 마림포를 결성하고 장타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강성우 본인은 정규시즌에서 타율 .222에 그치는 등 예년보다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수비에 있어서는 임수혁보다 한 수 위였기에 꾸준히 중용되었으며, 특히 이 해 포스트시즌 LG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정규시즌 20승에 빛나는 당시 최고의 좌완투수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으로부터 2회초 선제 3점 홈런을 날리고[* 95시즌 패넌트레이스에서는 홈런이 없다.] 연장전에서 결승 적시타를 때리는 등 타격에서 5타수 3안타 5타점으로 펄펄 날고, 수비에서도 기가막힌 홈 블로킹으로 득점을 위해 홈으로 달려드는 LG 주자들을 무려 세 차례나 횡사시키는 등의 엄청난 활약으로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이 경기는 강성우 역대 커리어 단일경기 최고의 퍼포먼스로 종종 회자된다. [* 그당시에는 포스트시즌 데일리 MVP 수상이 없었는데 있었다면 MVP가 될수 있었다.] 9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주전과 백업을 오가며 롯데의 안방을 지켰고, 특히 1999년에 [[차명주]]를 내주고 트레이드로 영입한 [[최기문]]이 가세했음에도 본인의 한 시즌 최다 경기인 112경기를 출전했으며 공격에서도 .283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존재감을 뽐냈다. 이 시즌 팀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를 거뒀고 시즌이 종료된 후 차기 시즌 주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0년은 주장이었음에도 최기문과의 주전 포수 경쟁에서 밀려나 출전 경기수가 51경기로 크게 줄어들었고, 타격에서도 .192의 타율에 그치며 크게 부진했다. 결국 2000년 시즌 후 포수 손석만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됐으며 그 이후 고향 팀이자 친정 팀인 롯데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양용모]], [[장재중]]과 경쟁이 있었는데, [[장재중]]은 2001년 4월 LG로 트레이드됐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ksports.net/Large_2001081323164421754_900.jpg|width=100%]]}}}|| || 말년을 보낸 [[SK 와이번스]] 시절. || 그 후 [[양용모]], [[김동수(야구)|김동수]](2002년 이적)과 함께 경쟁을 벌여 [[SK 와이번스]]의 주전 포수로 자리잡힐 듯 싶었지만, 그나마 2001년 트레이드 첫 해 110경기에 출전한 이후 매년 출전 경기수가 점점 줄어갔다. 특히 2003년부터는 FA로 풀린 [[박경완]]의 영입으로 인하여 주전 포수뿐만 아니라 백업 포수인 [[정상호]]와의 경쟁 면에서 입지가 더 좁아졌다. 결국 2군을 전전하다가 2005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지만 FA를 신청하지 않고 구단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면서 쓸쓸하게 은퇴했다. 현역 시절에는 경기의 흐름을 읽는 센스, 투수 리드, 근성, 정확한 견제구 등 수비형 포수로서의 장점을 두루 갖춘 선수였고, 이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골든글러브 후보에 여러차례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아예 방망이를 못 치는 것도 아니었던게 신인 시절 3할 타율을 기록했고, 1994년과 1999년에도 2할 8푼대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몇몇 해를 제외하면 2할 3푼조차 넘긴 해가 없는지라(2003년과 2005년은 타석 수가 적다) 통산 타격은 최악이다. 심지어 100타석 이상 나와서 1할을 친 시즌만 무려 '''4번'''이나 된다. 게다가 1992년과 1994년은 포수치고 준수했으나 1999년은 타고투저라 wRC+가 60도 안 된다(...). 통산 2000타석 이상 선수 중에서 장타율, OPS, wRC+는 꼴찌고 출루율도 허준에 이어 뒤에서 2위다. 그나마 타율은 뒤에서 9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