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상 (문단 편집) === [[역성혁명]] === 백수로 지내며 낚시를 하던 중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西伯) 창(昌), 즉 훗날의 [[주문왕|주나라 문왕]]의 눈에 띄여 중용된다.[* 육도에 따르면 문왕은 위수가에서 나라의 스승을 얻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사흘간 목욕재계 후에 사냥을 나갔다고 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오늘 큰 것을 낚았소' 이야기가 나왔다.] 강태공은 그 뒤 서백 창이 [[은나라]]의 [[제신|주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를 바치라는 조언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이후 문왕과 아들 [[무왕(주)|무왕]]을 보좌하여 역성 혁명을 달성했다. 주의 재상이었고, [[제(춘추전국시대)|제]][* 현재 [[산동 반도]] 지역이다.]의 국군(國君/왕)으로 봉해졌다.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로 일컬어지는 제나라 [[제환공|환공]]이 이 사람의 후손이다. 그러나 [[전국시대]] 제나라 국성은 전이었기 때문에 태공망의 후손이 아니다. 나중에 역성 혁명에 성공하고 개선하는 그의 앞에 가출했던 그의 아내가 폭삭 늙어서 돌아와 받아달라고 엎드리자 그는 그릇에 담긴 물을 바닥에 쏟은 후 "엎어진 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覆水不反盆)"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복수불반분]] 고사다.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에 따르면 70살 때까지 관직에는 안 나갔어도 수년간 활약하고, 부인도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론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전략가였기 때문에, 문신인 [[공자]]와 더불어 무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유교]]적 사상에 충실한 [[관우]]가 급부상하면서, '''[[도교]]적 성향이 강했던'''[* 엄밀히 말하면 도교의 성립 이전의 인물이지만 후대의 관점으로는 도교 사상에 가까웠다.] 태공망은 밀려나게 된다. 인의와 덕이 아닌 극형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인의 중심의 이상적인 정치를 중시하는 유가 계열이 득세하는 후세엔 공자 등에게 까이긴 하지만, [[유가(제자백가)|유가]], [[법가]], [[도가]], [[병가(제자백가)|병가]] 등 다수 학파들이 강태공을 선조로 모시는 관계로 백가종사(百家宗師)라 불린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인 급(級/伋)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정공]](齊丁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