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병규 (문단 편집) === 프로 경력 === || [[파일:external/www.donga.com/414-2.jpg]] || || [[OB 베어스]] 시절 프로필 사진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701000031481.jpg|width=100%]] || || [[두산 베어스]] 시절 타석에 나온 모습 (출처: 포토로) ||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19990414000039421.jpg|width=100%]] ||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702150952568Z1.jpg|width=100%]] || || (출처: 포토로) || (출처: 포토로) || 통산 성적은 56승 63패 [[평균자책점]] 4.15. 패가 승보다 많지만[* [[슈퍼 TV 일요일은 즐거워]] 코너인 [[돌격 앞으로]]라는 코너에서 강병규에 대한 문제가 나왔는데 문제내는 성우가 승이 많냐 패가 많냐고 하면서 강병규를 디스하기도 했다.] 그래도 강병규는 방송에서의 이미지나 이후의 일들로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선수시절까지 폄하되는 경향이 큰데, 이미지와 달리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선발 투수]]의 지표인 시즌 10승을 두 번이나 기록했다. 게다가 1990년대는 우승한 1995년을 제외하면 베어스의 암흑기였던 점이 크고, 타선도 [[우동수 트리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강하다고 볼 수 없는 타선이었다.[* 일단 90년대 초반이 투고타저 시대였고, 당시 OB는 제대로 된 규정타석을 채운 3할 타자가 1명 있을까 말까였다. 91년은 [[김광림]](.307), 92년은 [[김상호(1965)|김상호]](.300), 93년 [[김형석(야구)|김형석]](.306), [[김광림]](.300), '''94~96년 없음''', 97년 [[김상호(1965)|김상호]](.315), [[이종민(1972)|이종민]](.304), 98년 [[타이론 우즈]](.305)이었고 심지어 우승을 거두던 95년에도 규정타석 3할 타자가 아예 없었다. 그 우동수 트리오가 본격적으로 재능이 만개한 것도 1999년의 일이었다.] 통산 247경기 중 137경기가 선발이었는데 완투를 15회 기록하였고, [[선발 투수]] 등판시 평균 6이닝을 먹어주는 [[이닝 이터]]형 투수였다. 9회 2사까지 무실점으로 막다가 백투백 홈런을 맞고 2:1로 진 경우도 있었다.[* 1993년 대구시민구장에서 열린 대 삼성전이었는데, 당시 상대 투수는 [[박충식]]이었다. 신인왕 후보로 주목 받고 있던 박충식과 피칭 대결을 벌여 8회까지 무실점으로 삼성 타선을 봉쇄했으며 9회에 올라 선두 타자를 내보낸 뒤 맞이한 타자는 괴물 타자 [[양준혁]]. 큰 위기였으나 다행히도 양준혁을 병살타로 잡아 내어 순식간에 원 아웃만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후속 타자인 [[김성래]]에게 솔로 홈런, 그 다음 타자인 [[정영규]]에게 연속 타자 홈런을 맞으며 결국 패전 투수가 되었다.] 즉 방송에서 유머 소재로 삼던 것[* 방송 시작 후 1년쯤 지나서 패널 방송인 포지션에서 MC로 조금씩 입지를 다질 무렵에 일반인 대상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야구를 좋아한다는 일반인에게 다른 진행자가 "예전 프로야구 선수 강병규 선수 아세요?"라고 물어보면 일반인이 "누구죠? [[이병규(1974)|이병규]] 선수는 아는데요?"라고 답하면 가만히 있던 강병규가 민망해져서 웃는 식.]처럼 형편없는 실력의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진짜 실력이 형편없어서 은퇴한 선수였으면 2군에서만 4년간 뛰다가 그대로 사라진 [[윤현민]] 마냥 선수 출신인 것만 언급하고 넘어갔지, 프로 시절 이런 저런 해프닝이나 흑역사를 풀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랜 기간 꾸준히 1군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그만큼 에피소드나 유머 소재로 쓸 해프닝도 많은 것이다.] 1, 2선발을 맡을 만한 선수까지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어느 팀에 가도 3, 4선발 정도는 할 수 있는 투수였다. 이닝을 많이 먹었다고 하지만, [[평균자책점]][* [[평균자책점]]이 전부는 아니지만 수비지표가 없던, 그리고 현재까지도 부족한 [[KBO 리그]] 기록에선 [[평균자책점]]으로 밖에 따질 수 밖에 없다. 다만 요즘은 세이버매트릭스가 많이 발달되어 WHIP, ERA+ 등 다양한 지표를 동원하여 투수를 평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평균자책점으로만 투수를 평가한다는 말은 옛말이 된지 오래다.]이 4.15라는 것은 선발 투수로서 아주 뛰어났다고 볼 순 없다. 커리어 하이는 첫 10승을 기록하고 [[WAR]] 2.85를 기록한 1993년. 클래식 스탯과 세이버 스탯 모두 이 시즌이 제일 훌륭하다.[* 13승을 따 내며 다승 8위까지 기록한 1999년을 커리어 하이로 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으나 ERA도 5점대를 기록했고 WAR도 1.9라서 승리를 제외한 세부 스탯은 93년이 더 낫기 때문에 93년이 커리어 하이라고 볼 수 있다.] [[WAR]]로 볼 때, 보통 1선발급 선수는 5~6 WAR를 먹어주는데 강병규는 1~2점대의 시즌 WAR을 기록한 편이다.[* 이건 강병규가 선수 시절 등판한 경기 중 절반 가까이를 계투로 등판했던 것이 크다.] 굳이 비교하자면 삼성의 [[전병호]]와 통산 누적 WAR이 비슷한 편인데 누적 스탯은 두 시즌을 더 오래 뛴 전병호가 약간 더 쌓았고 평균자책점은 강병규가 좀 더 낫다. 또한 LG의 [[최원호]]와도 비슷한 편인데 30대 후반까지 선수 생활을 한 최원호보다 누적 스탯은 조금 딸리나 비율 스탯이나 통산 WAR은 비슷하다. [[스탯티즈]] 기준 통산 WAR이 12.6인데 이 수치는 통산 341위에 해당한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나서 지금까지 활약한 선수가 3,000명이 넘는다는 걸 기억하자. 상위 10%대의 선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90년대 초/중반 [[OB 베어스]]는 신인 드래프트에서 뽑은 투수들로 재미를 본 적이 드물었다. [[권명철]](92년 입단), [[김경원(야구)|김경원]](93년 입단), [[진필중]](95년 입단), [[박명환]](96년 입단) 정도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 데뷔한 선수들 중 OB에서 성공한 투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류택현]]이 선수 생활을 20년 넘게 했다고는 하지만 베어스에서 뭔가 제대로 된 성적을 남긴 것은 96~97 시즌에 불과하다. 게다가 두 시즌 동안 베어스의 성적이 영 좋지 않았고 [[류지현(야구)|유지현]]을 거르면서 데려온 1차 지명 선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성적은 절대 아니었다.] 강병규가 비록 저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90년대 OB의 쓸 만한 선발 투수이자 롱 릴리프로 꾸준히 활약했음을 감안하면 OB 베어스의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남길 만한 정도는 충분히 된다.[* 이 부분은 성남중-고 3년 선배인 [[차명석]]과 비슷하다. 90년대 팀의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투수였다는 점과 10년간 프로 생활을 하며 성적을 꾸준히 쌓고 은퇴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만 현역 시절 차명석은 대한민국 최초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이자 중간계투 최초 억대 연봉자라는 타이틀이 있다.] [[삼나쌩 클럽|유독 삼성에 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승엽]]에게는 약했다고 한다. 특히 [[이승엽]]이 1999년 54홈런을 치던 시즌에 그가 3개를 맞았는데, 그걸 가지고 토크쇼에서 참 많이 써먹었다.[* [[좋은 친구들(예능)|좋은 친구들]]의 코너인 기막힌 대결에서 강병규가 벌칙의상으로 이승엽 유니폼을 입게 됐는데 강병규가 나 차라리 여장할래라고 하면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강병규가 은퇴를 안 했더라면 당시 300홈런을 친 이승엽이 400홈런도 빨리 나왔을 거라고 디스하기도 하였다.] [[이승엽]]이 [[비타민(KBS)|비타민]] 게스트로 나왔을 때 이런 아픈 기억을 웃으면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이승엽]]에게 가장 많은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태평양-해태/KIA에서 활약했던 [[최상덕]](7개)이다. 하지만 [[이승엽]]에게 3홈런을 허용한 시즌이 그의 커리어 하이였다는 게 함정이었다. 평소 [[장호연]]을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연봉 협상을 질질 끌어서 임의탈퇴 위기에 가기도 할 정도로 구단과 마찰이 잦았다. 그렇다고 장호연의 피칭 스타일이나 자기관리를[* 하체의 중요성을 인지해 비시즌에 스키를 타면서 하체를 단련했을 정도로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본받았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기관리는 충실했던 장호연과는 달리 놀기 좋아한 탓에 [[스프링캠프]]에 늦게 합류하면서 이게 체력 부족으로까지 나타나 전반기에는 괜찮은 선발이었다가도 후반기에는 폭망하는 시즌의 반복이었다. 그나마 괜찮게 한 게 1993년과 1999년. 이때가 강병규 역사상 유이한 두 자리 승수 시즌이다. 게다가 99년은 역대급 타고투저 상황이었기 때문에 13승을 거뒀음에도 정작 평균자책점은 상당히 높다.[* 다만 이닝도 많이 먹었고 이 시즌이 역대급 타고투저였기 때문에 이 점을 감안해 WAR은 1.9를 기록, 무난한 3선발 정도의 수치를 기록했다. 당시 두산의 에이스는 강병규의 2년 후배인 이경필로, 이 시즌 강병규와 똑같이 13승을 기록했는데 평균자책점은 3.12로 굉장히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한국야구선수협의 선수협 파동에서 [[송진우(야구)|송진우]], [[김재현(1975)|김재현]], [[마해영]] 등과 함께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공로가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spo&arcid=0005376641&code=41161111|있다]]. 다만 나중에 보인 [[막장]] 행각으로 다 까먹었다. [[강병규/논란 및 사건사고]] 참조. 선수협 파동이 터지자마자 2000년 시즌을 단 1주일 앞두고 SK 와이번스의 창단지원선수[* 각 팀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된 선수들을 신생팀 SK 와이번스가 인 당 10억원을 주고 데려갈 수 있는 제도였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기존 구단들의 텃세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핵심 전력을 보호선수로 묶어두고 잉여자원을 10억원씩 주고 데려가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2할대의 승률을 거둘 정도로 전력이 약했던 99 쌍방울의 전력을 물려받은 SK 입장에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이 선수들을 데려간다. 두산은 강병규를 보호 선수에 묶지 않았는데 이건 강병규가 이미 구단 윗선에게 제대로 찍혀있음을 암시한다.]로 선정되어, 광속 트레이드되었다. 그 말고도 타 팀의 선수협 관련자들은 대부분 트레이드되었다. 살아남은 [[송진우(야구)|회장님]]이 특이한 케이스였다.[* 다만 [[송진우(야구)|송진우]]는 FA 때 삼성과 한화 두 구단에서 제안을 했을때 한화를 선택한 이후 구단 측과는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그래서 [[원클럽맨]]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SK 와이번스]]로 이적한 후, 당시 [[강병철]] 감독이 낮 경기에 강병규를 [[중간계투]]로 등판시키려 했으나 '''"햇빛 알레르기가 있어서 낮 경기에는 뛰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드립'''을 날려 SK 코치들은 물론 프런트 전체에게도 완전히 찍혔다. 두산에서 내쳐지면서 야구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식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SK는 직전 시즌 13승을 기록한 강병규에 대한 기대가 컸다. 2000년 강병규의 연봉은 1억 원이었다. 00시즌 SK 선수단의 기반이 된 99시즌 쌍방울은 10승을 거둔 투수가 아예 없었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수가 [[박정현(투수)|박정현]]인데 5승 11패 3세이브 평균자책점 3.92였다. 더군다나 박정현은 허리 부상으로 인해 재기 가능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였다. 그래서 전 년도에 두산에서 10승 이상을 거둔 강병규에 대한 기대가 클 수 밖에 없었다.][* 먼 훗날 2018년 개인 방송에서도 ''' ''10년 잘 써먹고 10억 받아서 내보냈네. 야 두산 참 장사 잘 해, 예나 지금이나." '''라고 두산을 대놓고 깠다.]결국 2000 시즌을 날린 후 [[박재용]], [[박정현(투수)|박정현]], [[김정수(1962)|김정수]], [[장광호]] 등과 같이 SK에서 방출당했다. 방출 이후 LG의 영입 이야기가 나왔으나 당시 LG 트윈스 프런트는 LG 투수들 가운데 강병규 정도의 선수는 쌓이고 쌓였다며 영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병규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식어 00년 태업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중간계투요원으로 올라와서 불만 지르고 8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00년 LG 투수진을 보면 오히려 강병규가 영입되는 것이 더 나았다. 에이스 역할을 한 해리거는 00년에 200이닝을 넘게 던졌고 [[장문석]]은 선발과 계투를 오가면서 137이닝을 던졌다. [[이승호(1976)|이승호]]와 [[최향남]]을 빼면 계투요원 중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투수는 없었다. 야구에 만약은 없다고 하나 강병규가 LG에 입단하여 다시 부활했더라면 치열한 4강 싸움 가운데서 LG가 다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