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동희 (문단 편집) === 코치 시절 === [[파일:창원 LG 박종천 감독과 강동희 코치.jpg]] 2004년 은퇴 후 곧바로 창원 LG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가 코치를 시작했을 무렵엔 이미 팀을 떠난 [[김태환(농구)|김태환]] 감독에서 새로 부임한 [[박종천(1960)|박종천]] 감독 체제였으나 6강 PO에 꾸준히 들었던 팀은 9위로 추락하면서 자진사임했고, 동시에 새로 들어온 [[신선우]] 감독이 코칭스태프 전면개편을 감행하면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파일:전창진 감독 강동희 수석코치.jpg]] 그렇게 힘든 마음으로 야인 생활을 이어가다 2005-2006 시즌 동부그룹이 TG 삼보를 인수한 [[원주 DB 프로미|원주 동부 프로미]]에서 수석코치직으로 지도를 시작하게 된다. 제이 험프리스 코치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의 감독이 되면서 공석이었는데 전창진이 품게된다. [[전창진]]과는 학벌이나 실업의 인연이 없지만 [[허재]]라는 연결고리가 있었고 전창진 감독이 가드 지휘를 이유로 부르게 된다. 강동희는 이렇게 되면서 전창진 사단에 포함하게 되며 1년뒤 LG에서 정리된 후배 김영만도 전창진 사단에 들어가게 된다. 가드 라인을 중심으로 포인트 가드 보다 슈팅 가드를 더 활용하게 유지하였다.[* 코치 재직 당시에는 [[이세범]], 2006-07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로 합류한 [[표명일]], 슈팅 가드 자리를 잡지 못했던 [[강대협]], 전창진 감독의 농구대선배로 이왕돈의 아들로 유명한 [[이광재(농구)|이광재]] 등에게도 투맨 게임을 치밀하면서도 세밀하게 가르쳤다.] [[파일:전창진 강동희 김승기.jpg]] 2007-2008 시즌에는 동부 프로미의 KBL 통합우승에 공헌하였으며 이후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전창진이 [[부산 kt 소닉붐]]으로 가면서 감독 자리를 물려 받았다.[* 전창진과 강동희가 대학과 프로에서의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성인완 단장이 내부승진시켰던 건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전창진 감독이 성인완 단장에게 강동희 수석코치의 내부승진을 부탁했고, 강동희의 내부승진이 확실시 되자 편한 마음으로 떠났다고 한다.][* 참고로 [[전창진]]은 [[부산 kt 소닉붐]]으로 이적하면서 [[김승기(농구)|김승기]]는 동부 시절 보조코치였으나 kt에서는 수석코치로 두고 [[손규완]]도 선수에서 슈터코치로 두었다. 이후 자신은 구설수로 인해 가까스로 [[전주 KCC 이지스]]로 떠났지만 [[안양 KGC인삼공사]]로 데리고 가면서 남아있었던 김승기와 손규완은 보직이 하나씩 올라갔다.][* 일명 전창진 사단의 수석코치 출신 감독의 성공신화로도 이어졌다. 유재학도 사실 사단보다 인맥이었는데 전창진은 달랐다. 김진도 사단의 개념이 아니었지만 김동광 또한 사단의 개념이 짙었다. 지도했던 스승인 최인선도 인맥으로 활용했다. 또한, 중앙대-기아의 색이 짙은 마지막이었던 [[김영만(농구)|김영만]]도 자신이 동부 감독 시절에 선수 마지막이었지만 은퇴를 [[허재]]가 있었던 [[전주 KCC 이지스]]에서 배려를 하면서 지도자로 숨은 헌신을 했다. 즉,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의 중간이 바로 [[김영만(농구)|김영만]]이다. [[표명일]]과 [[이세범]]도 모두 전창진 사단과 강동희 사단에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