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금원 (문단 편집) == 생애 == 1952년 11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태어났다. 전주공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섬유사업을 했는데, [[지역차별]]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후일 이렇게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호남사람으로서 부산에 건너와 사업했다. 부산이 나의 제2의 고향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호남에 대한 끝없는 편견과 선입견에 시달려야 했다. 툭하면 사람들은 말했다. 호남 사람 의리 없다, 신용 없다고... 하지만 나는 보여줄 것이다. 호남 놈이 얼마나 신용 있고 의리 있는지... 부산 사람 노무현 대통령이 보여줬던 호남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면 나 또한 역시 호남 사람으로서 보여주고 싶다. 권력에 불나방처럼 달려들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도... 내가 대통령 옆에 있음으로서 호남사람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고쳐주고 싶다.”] 그래도 1975년 설립한 창신섬유가 크게 성장하여, 부산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특히 창신담요는 따뜻하고 정전기가 없어서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1998년 정치인 [[노무현]]이 서울 종로구 [[1998년 재보궐선거|보궐선거]]에 출마할 당시 전화로 처음 만났으며, 노무현이 지역주의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에 감명받아 2000년부터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부산 북·강서 을 지역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노무현에게 "이제 대통령밖에 할 게 없네"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대통령 출마를 권유했다고 한다.] 노무현에게 “먹고사는 문제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소신껏 정치를 하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노무현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 ''''대통령에게 누가 될까봐'''' 한치의 사업도 확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박연차는 노건평 등을 앞세우며, 대대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실제로 박연차는 참여정부 기간 동안 신발산업협회장을 지냈으며, 세종증권 주식투자와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 인수로 쏠쏠한 이익을 봤다. 골프장을 건설하는가 하면 베트남 화력발전소 건설 국책사업 입찰에도 성공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자기 측근들을 요직에 거의 챙겨주지 못했는데, 강금원이 그를 대신해서 가난한 친노인사들에게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후일 강금원은 “내가 돈 준 사람은 다 백수”라면서 “공무원이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이 “그 많은 돈을 왜 줬냐”고 묻자, 강금원은 “사고치지 말라고 준 것”이라면서 “그 사람들 대통령 주변에서 일하다가 놀고 있는데 먹고 살 것 없으면 사고치기 쉽지 않겠느냐. 사고치지 말고 뭐라도 해보라고 도와 준 것”이라고 답했다.] 이후 2003년 12월, 검찰 수사를 받고 배임 및 조세 포탈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으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는데[* 2003년 12월 31일, 당시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호철 민정비서관 등이 강회장에게 면회하러 왔는데, 문재인이 "대통령께서 내일(2004년 1월 1일) 면회를 오고 싶어 하신다"고 전하자, "미쳤느냐. 여기가 어디인데, 오신다는 것이냐. 오시지 말라고 해라"라고 크게 호통을 쳐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지 '''단 6개월'''만에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었다. 노무현 퇴임 후에는 검찰이 그와 노무현 주변에 대해 수사를 실시하였는데[* 노무현이 사법시험 치르기 전부터 다녔던 성당의 송기인 신부는 이 당시 식당 가서 밥 사먹고 받은 영수증까지 검찰에게 털렸다고 한다.] 이 당시 검찰에게 최우선의 수사대상이었던 게 노무현과 강금원 사이의 비리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비리는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시작되면서 노무현과 강금원을 본격적으로 옥죄기 시작했다.[* 박연차가 노무현 퇴임 후에 [[권양숙]]에게 100만 달러의 돈을 줬다는 것에 대한 수사이다. 박연차가 준 돈에 대해 노무현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권양숙이 받은 것은 사실인 듯하고, 이를 계기로 노무현의 도덕성은 급격히 무너져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봉하마을에는 친노 인사들이 거의 발길을 끊다시피 하였고, 오직 강금원과 [[안희정]] 등 몇몇만이 노무현 곁을 지켰다고 한다. 2009년 4월에 1999년∼2002년 주주임원에 대한 단기 대여금 형식으로 회사돈 50억원을 빼내서 회계장부상 비용과다 계상 등으로 허위변제 처리하고 같은 기간 법인세 13억5000만원을 포탈한 혐의. 특경가법상 배임 및 특가법상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 당시 노무현이 미안한 마음에 면회를 신청하려고 했으나, 마음은 알겠다면서 만류했다.[* 이 당시 노무현은 강금원에 대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면서 홈페이지에 자신을 ‘면목 없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노무현의 자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강금원이 수감되기 전까지 창신섬유는 직원이 400명에 이르는 등 부산의 대표적인 섬유업체였는데, 검찰의 계속된 수사와 거래업체 압박으로 직원이 60명까지 줄어들었다. 지금도 회사 자체는 동생이 이어받아서 남아 있지만 20명 내외의 직원만 남아있는 수준이며, 예전에 비하면 회사 규모가 많이 영세해졌다.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서 담요를 만드는 공장만 남겼다고 한다. [* 거래처 다 끊기고, 나중엔 이불 등 재고 상품들을 땡처리로 오픈마켓에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제품 품질이 무척 좋아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한다.] 구속기간 동안 지병인 [[뇌종양]]이 악화되어 보석을 신청했으나 거부되었다가, 며칠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서거 당일 보석이 허가되어 노무현의 빈소 방문 후 수술을 받았다. 다만, 수술 시기를 놓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요양 생활을 하다가 [[2012년]] [[8월 2일]], 향년 만 5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별세]]했다. 강금원의 사후 민주당 일부 인사들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다느 것이 송인배를 조사하며 확인하였는데, 검찰은 수사를 통해 2019년 [[송인배]]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기소하였으며, 다른 인물들([[안희정]], [[양정철]], [[서갑원]] 등)은 수사하지 않았고 [* 당시 안희정과 양정철, 윤태영 등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있어 정치자금법 위반의 소지가 없었던 점도 있다.] 처벌 대상도 되지 않았다. 송인배가 기소된 혐의는 강금원의 수사 과정에서 확인된 자금이 아니라 그 사후에 발생한 일이다. 2018년 5월 1일, [[봉하마을]]에 강금원의 이름을 딴 강금원기념 봉하연수원이 개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