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감리회 (문단 편집) === 아메리카 메소디스트 교회의 설립 === 메도디스트 신도회는 급속도로 부흥했고, [[성공회]]와의 마찰도 커져 갔다. 이에 많은 이들이 새로운 [[교회]]를 설립할 것을 종용했지만 존 웨슬리는 [[성공회]]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교회이며, 떠나지 않을 것을 거듭 분명히 했다. 하지만 독립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1776년부터 [[미국]]은 [[미국 독립전쟁|독립 전쟁]]을 벌인다. 미국과 영국사이의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은 본국으로 철수했다. [[존 웨슬리]]는 성례전을 받지 못하는 [[미국]] 내 메도디스트 신자들을 생각했다. [[존 웨슬리]]는 독립해 나간 미 식민지는 [[영국]]과 경우가 다르며, 오랜 기간 동안 고찰한 바에 따라 초대 교회에서 감독과 장로의 직능에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는 점에 착안했다. 1784년, 웨슬리는 같은 [[국교회]] [[사제(성직자)|사제]]였던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리사(Superintendent)'로 안수하고, 평신도 설교자였던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도 감리사로 세울 것을 명령했다. 독자 안수는 곧 분립이었기에 미국에서 메도디스트 신도회가 국교회와 분리된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토마스 콕은 [[미국]]으로 건너가 1784년 11월 3일 [[뉴욕]]에 도착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볼티모어에 모여 이른바 '크리스마스 연회'를 열었다. 콕은 애즈베리에게 3일에 걸쳐 안수를 주어 감리사로 세웠다(첫날은 집사 목사, 곧 부제로, 둘째날은 장로 목사, 곧 사제로, 셋째날은 감리사, 곧 감독으로). 이때 애즈베리는 연회원들의 합의가 없으면 존 웨슬리의 임명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만장일치로 감리사로 추천 되었다. 연회원들의 합의에 의한 감리사(감독) 임명은 이후 감리교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이듬해 1월 2일까지 열흘간 계속된 이때 연회에서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결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 콕과 프랜시스 애즈베리는 감리사 대신 '감독(Bishop)'이란 명칭을 썼고, 공식적으로 자신들 교회의 이름을 미 감리교회(The Ame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라고 명명했다. 존 웨슬리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미국]] 감리회 교인들은 [[존 웨슬리]]의 리더십은 [[영국]] 내에서만 유효하다고 보았으며, 이때 [[존 웨슬리]]는 '온 몸이 무너져 가는 늙은이'로서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