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족 (문단 편집) == 기원과 중국 정착 == 갈족은 본래 [[흉노]]족의 지배를 받던 피지배 종족의 하나로써 흉노의 일파로 여겨졌다. 원래 갈족의 '''갈'''(羯)은 '거세한 양'을 뜻하지만, '갈'(羯)은 [[중고한어]]로 '''캿'''(kiat) 정도로 재구성된다. [[튀르크어족|고대 튀르크어]]로 ‘khes’ 또는 ‘kit’는 돌을 뜻하며, [[예니세이어족]]의 남예니세이어파에 속한 아린-품포콜어에서도 돌을 'kes' 또는 'kit'라고 하므로[* 사족으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Taş.], 후조 황족의 성씨가 돌을 뜻하는 [[석(성씨)|석(石)씨]]라는 점과 연결지어서, 민족명인 '갈'은 돌을 뜻하는 단어에서 기원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민족명에 쓰인 한자 '갈'(羯)은 당시 중국인들이 그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민족을 가리키는 한자명 중 좋은 뜻을 가진 글자는 별로 없다.] 코가 크며 눈 색깔이 푸르거나 수염이 붉고 많다고 기록되어 있어 중앙아시아에 살던 [[스키타이]] [[아리아인]]의 후손인 [[소그드인]] 혹은 [[강거]], [[월지]] 등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 [[토하라인]]으로 추측하는 학설이 있다. 또는 갈족의 정체를 [[예니세이어족|예니세이계 민족]]으로 추측하는 설도 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동북아 계통이지만 고대 아파나시에보 문화권[* 기원전 2300년 무렵부터 기원전 1000년 즈음까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예니세이 강]] 유역에서 생긴 [[인도유럽어족]] 계통 문화권으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일대의 선주민인 [[토하라인]]의 직계 조상이다.]의 영향으로 이들도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이전에 이미 혼혈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케트족]]들은 [[벽안]]을 지닌 이들이 간간히 보이는 등 외모가 이국적인데, 중국 기록상에서 언급되는 갈족의 외모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https://live.staticflickr.com/65535/50649110966_58e4e403be_h.jpg|#]][[https://live.staticflickr.com/65535/50621208212_a882976afc_h.jpg|#]][[https://live.staticflickr.com/65535/50572090577_3bc7c24e5a_h.jpg|#]][[https://live.staticflickr.com/65535/50571216313_e0c11f46cc_h.jpg|#]] 다만, [[알렉산더 보빈]]을 포함한 [[언어학|언어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남은 갈족의 언어로 된 문장을 재구한 결과에 의하면, 케트족보다는 이들과 같은 [[예니세이어족]] 계통의 민족인 [[아린-품포콜족]][* 17세기까지 오늘날의 [[몽골]] 북부에 살았던 [[예니세이어족]] 계통 민족이다.]과 가까운 민족일 가능성이 더 크다. 종교적으로 [[후조]]의 황실에서는 '''호천'''(胡天), '''호천상제'''(胡天上帝)란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리아인]]과 연관짓는 학자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로 추정하고, [[튀르크]]나 [[예니세이어족]] 계열로 보는 측은 [[텡그리]]로 추정한다. [[옥황상제]] 항목에 나오는 호천상제와는 다르다. 대체로 [[이란]]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권에서는 전자를, [[몽골]]·[[튀르키예]]·[[헝가리]] 등 [[우랄 알타이 제어]]권의 [[범투란주의]] 진영에서는 후자를 정설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중국 측 기록에는 갈족이 [[식인]]을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고대 [[시베리아 원주민]]들 일부는 잉여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 때문에 전쟁 포로를 바로 죽이거나 종종 잡아먹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나 [[노르드인]]들의 역사 기록에도 한대 지방 민족들의 식인 풍습이 종종 언급된다. 호밀, 귀리 같은 추운 지방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 보급되고 모피와 식량을 교환하는 무역에 성립되면서 식인 문화가 사라진 듯하다. 비슷한 이유로 [[그린란드]]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에는 중세 때 [[빈란드|이주해와 정착한 바이킹들]]의 후손들이 없다. [[이누이트]]들에게 전쟁 포로로 잡히는 즉시 다 죽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갈족의 [[식인]] 행위에 대한 기록은 이와 같은 원인이 있는 듯하다. 서기 1~3세기경 흉노가 동서남북으로 유린당하자, 흉노의 지배를 받던 갈족과 남흉노 및 [[동호]]가 중국으로 남하하여 [[후한]] 말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나라]]에 종속되었다. 이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중국의 최북단 지역 [[병주]]나 [[유주(중국)|유주]]로, 그 바로 위에 [[선비족]]이나 [[오환족]] 등과 같이 북방 종족들의 영역과는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당시 중국 고위층 사이에선 갈족 여자들이 미인으로 유명해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어느 관리건 [[병주]]나 [[유주(중국)|유주]]의 자사로 부임한다고 하면 그 관리에게 갈족 여자를 구해다 달라고 청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인기가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남북조시대]] [[동진]]의 [[명제(동진)|명제]]는 선비족 혹은 갈족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염이 갈색이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