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레리우스 (문단 편집) === 황제 === [[파일:세르비아 터키 궁.jpg|width=820]] 세르비아 동남부에 남아있는 펠릭스 로물리나. 갈레리우스가 세운 궁전이다 대개의 일리리아 출신 황제들이 그렇듯, 출세를 위해 로마군에 입대해 고위군 장교를 거쳐 로마 제국 지배층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비슷하게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위장교를 거친 세베루스 2세와 달리, 굉장히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또 그는 부제로 지명되기 전부터 탁월한 전략가이자 뛰어난 다뉴브 일대 주둔군 장군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당시 동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帝)의 황녀 발레리아와 혼인하기 위해 본부인과 이혼했으며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 의해 그의 직속인 동부 부제(副帝)로 책봉되었다. 서방 부제로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임명되었다. 갈레리우스는 부제로 즉위하자 이민족 격퇴에 힘썼다. 293년엔 [[도나우 강]]의 야만족들을 격퇴하여 도나우 강 일대를 수복했고, 298년엔 [[사산 왕조]](페르시아)의 [[나르세스 1세]]를 상대로 [[사탈라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크테시폰]]을 넘어 [[티그리스 강]] 동쪽까지 진출한다. 이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동진(東進) 사례이기도 하다. 점령지에 대해, [[공세종말점]]의 개념에 따라 사산조와 강화조약[* 당연하지만 로마 제국에 유리한 조약이였다.]을 맺어 크테시폰과 아르메니아 지방을 교환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약 40년간 평화상태를 유지하게끔 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정제가 재위할 시기 대대적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기독교 박해]]가 이뤄졌는데 이는 부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제에게 황궁에 화재가 일어난 건 기독교인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기독교 신자들을 무참히 처형하는 조직적 박해가 이뤄졌다. 이후 305년 갈레리우스는 장인이자 동부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제의 돌연 은퇴 선언으로 그를 계승하여 동부의 정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방 부제였던 콘스탄티우스도 서방 정제가 되었다. 즉, 2차 사두정치의 시작인 셈이나 1차와 다르게 이것은 새로운 [[로마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갈레리우스는 외조카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동방, 자신의 신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를 서방 부제로 임명했고, 곧 306년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브리튼]]과 [[갈리아]]를 장악하고 그곳에서 황제로 추대되자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를 서방 부제로, 기존의 부제였던 세베루스는 서방 정제로 승격시켰다. 한편 세베루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공치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서방 정제를 참칭, 아버지를 [[중조]]시키자([[사두정의 내전]]) 그들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도리어 패하고 포로로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갈레리우스 역시 이탈리아를 공격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채 퇴각한다. 발레리우스 세베루스가 사망하자 308년 [[리키니우스]]가 서방정제로 책봉되었다. 이에 반발한 자칭 서방 정제 [[막시미아누스]]는 자신도 군대에게 옹립받은 서방 정제라는것을 통보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6명의 황제가 동시 재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다만 선임황제인 갈레리우스가 생존했을 당시 6개의 로마 제국은 교착을 유지했었다. 이후 311년 중병으로 몸져눕자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자신에게 기도하라고 관용조서를 발표했으나 발표한지 6일만에 사망, 그가 사망하자 6개의 로마 제국은 교착을 깨고 내전에 돌입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의 통합으로 종결되는 결말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