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호장교 (문단 편집) == [[대한민국 국군]] == || [[파일:attachment/KaNurse.gif|width=100%]] || || 대한민국 육군 간호병과 휘장 || [[1948년]] 8월 26일, 당시 [[대한민국 육군]] 의무감이었던 박동균 소령이 [[미군]]에 의뢰하여 사회에 있던 면허 [[간호사]] 150명에게 접수를 받아 그중 31명을 [[소위]]로 임관시킨 데서 출발한다. 그 후엔 각종 민간 유입과정을 통해 채용했다. 임관 계급은 [[소위]]. [[사관생도]], [[학사장교|학사사관]], [[부사관]] 등 군에 여성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던 [[1990년대]] 이전까지는, 간호장교는 [[여군]]의 절대다수였다. 아예 2012년 전까지는 [[국군간호사관학교]]에선 여자 생도만 받았다. 현대에는 [[국군간호사관학교]]의 학교장([[준장]])이 [[진급 상한선]]이다.[* 참고로 [[군의관]]의 진급 상한선은 ~~육군~~소장인 의무사령관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의무사령관 보직을 중장으로 격상시키도 했다. 준장~소장이 진급 상한선인 다른 비전투병과에 대한 형평성 문제와 함께, 군에 장성이 넘쳐난다는 지적에 따라 단 한 차례에 그치고 다시 소장 계급으로 환원.] 의무행정(의정장교)과 [[군의관]]들도 사이가 안 좋지만, 간호장교 역시 이들 둘과 다 사이가 안 좋다.[* 가끔은 다른 병과 [[여군]]들과 사회에서 간호사 면허증을 따고 학사장교로 입대한 간호장교들이 "사열할 때도 군장이 아니라 핸드백 하나 달랑 들고, 그나마도 그 안에 화장품 짱박아 놓는 병과"라고 뒷담까기도 한다. 별도 교육기관에서 훈련받은 [[국군간호사관학교|국간사]] 출신을 그런 눈초리로 쳐다보기도 한다. 사회 ([[간호대학]])에서 간호사 면허증을 딴 후 [[전문사관]] (육군), [[학사장교|학사사관후보생]] (해군,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20627_0011228235|공군]])으로 들어온 간호장교들도 훈련소에서는 다른 병과 후보생과 (심지어 공군으로 간 경우 조종특기와 같이) 똑같은 훈련을 받았지만 임관 후에는 평소 근무가 편하다고 여겨져서 그런지 뒷담이 좀 까인다. 심지어 현역병 혹은 부사관으로 전역 후 [[재입대]]한 간호장교들도. 특히 해군은 [[해군사관후보생|진해]], 공군은 [[공군기본군사훈련단|진주]] 짬밥을 먹고 바로 자대로 배속됨으로써 간호장교가 되기 때문에 다른 후보생과 훈련을 같이 받는다.] ~~결국 셋이 서로 사이가 안 좋다는 거~~ 다만 이것은 케바케인데, 군의관이나 간호장교나 의무행정 간부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군병원들도 있다. 대개 예하제대 의무대의 경우가 그렇다. 1970년대부터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과정을 설치했고, 1980년에 이름을 [[국군간호사관학교]]로 두었다. 연간 배출 인원은 60-70명 수준.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한 인원이 간호장교의 주류를 이룬다. 국간사 출신이 아니더라도, [[간호사]] 면허 소지자는 각 군에서 모집하는 [[학사장교|간호사관]]에 지원해도 간호장교가 될 수 있다. 공군에서는 학사사관후보생 모집 때 같이 모집하며, 사회에서 [[간호학]]을 배웠다는 이유로 임관 후 자대로 직접 배속된다. 여담으로 [[대한민국 공군]] 간호장교의 경우 같이 근무하는 [[군의관]]보다 어쩐지 [[전투조종사]]와 눈 맞아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다. 공군에서는 간호장교도 공중근무자로 분류하고 조종사들과 접촉할 기회도 꽤 많기 때문이다. [[6.25 전쟁]] 당시 북한군 6명을 사살해 전쟁영웅이 된 간호장교가 있다. 게다가 이분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광복군]] 출신의 항일투사였다고. [[https://news.joins.com/article/214489|오금손 대위의 실화다.]] 오금손은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로 15살이 되던 해에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고, 해방 후에는 개성에서 간호전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일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제3보병사단|백골부대]] 간호장교로 입대했다. 포항 형산강지구 전투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던 도중, 갑자기 북한군 1개 분대와 조우, 부상병의 카빈 소총으로 적과 교전, 그 자리에서 6명을 사살했고 나머지 적군 3~4명은 오금손 대위(당시 소위)의 기세에 눌려 도주했다고 한다. 그때 오금손 소위의 나이는 방년 20세에 불과했지만 광복군 시절 사격과 전투훈련을 철저히 받은 결과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북한군의 포로로 잡혀 고문과 회유를 당하다 탈출해서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오금손은 당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군에서 전역했고, 군부대와 학교에서 안보 강연을 하며 살다가 2004년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간호장교로 근무하다 [[전역]]한 뒤에 [[군무원]]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남자간호장교의 경우, 1974년 남자간호장교후보생을 모집하여 총 26주의 교육을 받고 같은 해 5명이 임관된 것이 최초이다. [[국군간호사관학교]]에서는 2012년 최초로 남자 생도가 입학하여 2016년에 임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