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신 (문단 편집) == 간신은 정말 간신인가? == [[임사홍(조선)|임사홍]] 등이 대표적 사례. 그리고 [[왕안석]], [[한명회]]처럼 한쪽 면에서만 평가할 수 없는 존재도 있긴하다(사실 왕안석의 경우엔 [[성리학]]자들의 [[디스]]에[* [[필원잡기]]에 따르면, 어느날 [[집현전]] 학사들이 "[[왕안석]]을 어느 전기에 놓아야 하느냐"는 토론을 하니 대부분 사람들은 "간신전에 놓아야 한다"고 했으나 후에 [[사육신]]의 한 사람이 되는 유성원만이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후에 송사(宋史)가 조선에 들어오니, 역시 왕안석이 간신전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한명회의 경우엔 [[권신]]에 가깝다.[* 그런데 이게 또 애매한게,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소위 [[수양대군|세조]]의 원상집단의 리더로 그들의 세력이 강해질수록 세조는 이들을 통해 관료들에게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였고 세조도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물론 세조 치세 말기로 가면 세조도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지만... 또 한명회의 권력행사가 세조의 권력을 심하게 침해했다고 보기는 힘든 게, [[이시애의 난]] 때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뻔히 헛소문인거 아는 내통 소문을 이유로 잡아 가두고도, 나중에 무죄로 밝혀져 풀어주면서 데꿀멍하기는 커녕 '''"니들이 알아서 조심했으면 이런 일 없었지!"'''라고 큰소리까지 쳐댔다. 물론 이건 한명회에게 권력이 없던 게 아니라 '''세조의 왕권이 개쩔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동양 [[국가 막장 테크]]의 주요 원인이던 외척, 환관들마저도 "생각보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란 재조명이 나오는 것이 현 상황이다. 또한 정쟁으로 죽은 사람을 후대에 복권시킬 때도 그게 군주의 뜻으로 죽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군주가 잘못해서 충신을 죽였다고는 할 수 없으니 "이게 다 간신 아무개가 모함해서 그렇다."라고 총대만 멘 신하에게 뒤집어 씌워 간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남곤]]이나 [[정철]]이 있다. 간신이란 정의 자체가 역사를 선과 악으로 이분하려는 춘추사관적인 태도가 짙다는 분석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간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도 정말로 악랄했던 것이 아니라 무능이나 다른 이유로 반대파에게 '간신'이라 낙인 찍힌 경우도 종종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군주]]의 방패막이'''라는 설도 있다. 차마 군주를 깔 수는 없으니, "간신이 임금님을 망친다!"는 식으로 깐다는 것. 그리고 [[유교]] 문화권에선 "사람의 됨됨이를 보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된다" 라는[* 일단 현대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는 한자성어 중에서만 보자. [[근묵자흑]], [[근주자적]], [[유유상종]], [[맹모삼천지교]] 등등.] 말이 꽤나 지지받고 있었기에, 군주의 주변에 간신만 많다고 비판해도 간접적으로 군주를 비판하는 효과가 달성되기는 했다. 요즘 시점에서 보면 어지간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이상, 간신을 키우는 군주 쪽이 잘못이다. 이른바 간군(奸君). 대표적인 사례로는 남송의 [[휘종]], [[흠종]], [[고종]], [[명나라]]의 [[가정제]]가 있다. 욕받이는 당연하지만 [[유교]]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평상시에도 군주의 외도를 남자다움의 덕목을 갖추어 나라의 위신을 살리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때문에 군주가 혼외정사를 하는 것은 긍정적이었던 반면 그 대상이 되는 여자, 즉 [[로얄 미스트리스|군주의 정부]]는 항상 '요망한 창부'로서 욕받이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군주의 정부를 비난하는 건 국민 스포츠였고 이 비난은 왕후도 예외는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선 뒤에는 [[신문]]의 발달로 한층 욕 수위가 업그레이드되고 추잡스러운 삽화까지 더해지면서 이런 음담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특히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위기간 동안 항상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그동안의 왕비와는 비교도 안되는 모진 경멸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의 무능과 선왕들의 사치로 빚어낸 국가 경제 파탄과 부정부패의 방종 등으로 인해 프랑스가 막장이 된 걸 백성들이 '''"이게 다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출신 왕비가 우리 현명하신 임금님을 망쳐놔서 그렇다"'''라고 비난하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대 신문의 발흥기 때문에 온갖 성적인 루머에 시달리며, "호화로운 궁궐에서 국민의 혈세로 수십명과 줄지어 난교파티나 열고 있는 문란하고 멍청한 오스트리아 창녀"라고 만화 삽화까지 그려져 음해받기도 했다. 더구나 역대 프랑스 군주들과 달리 루이 16세는 여색에 관심이 없어서 정부도 들이지 않았는데, 국민들은 오히려 "이건 전부 바가지 긁는 왕비 탓"이라며 "왜 우리 임금님 기를 죽이고 그러냐!?"라고 비난했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대 프랑스 왕비 중에서 가장 검소했지만 남편 루이 16세에게 정부가 없던 탓에, 보통 군주가 가장 총애하던 애첩(총희)이 열던 사교계 파티를 주최하는 역할도 맡아야 했다.[* 단 프랑스 대혁명 원인은 왕실과 귀족의 사치가 아니라 국가부도위기에도 국토40%나 차지한 귀족들이 면세특권을 고집하는 추태에 평민계급이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사치가 심하고 주체적으로 혈세를 낭비하는 재주가 있다"는 이미지가 씌워졌다. 또한 잡다한 프랑스식 의전을 귀찮아하고 간신을 멀리하려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귀족들과도 불화가 많은 편이었다. 프랑스의 국민들은 이런 음해에 선동되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옹호할 귀족들마저 줄어들면서(왕비를 보호해주겠다는 [[라파예트]] 자작 같은 이는 소수였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마침내 1789년 10월에는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대포까지 끌고 베르사유 궁궐로 쳐들어갔다.]]''' 결국 루이 16세가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도 "우리 착한 임금님을 꼬셔서 약속을 어기게 할 거다"라는 근거 없는 낭설이 나돌았고, 이에 분노한 아줌마들이 문을 때려부수고 경비병들은 궁의 방 문을 보이는대로 가구로 틀어막는 난리가 났다.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오는 아줌마들에게 겁을 잔뜩 먹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의 침실로 도망쳐서 소리를 지르고 문을 때리며 들여보내달라고 애원했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서 한참 동안 왕비의 목소리를 듣지못했던 루이 16세가 겨우 들여보내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경비병들을 잡아 참수해서 창끝에 효수해서 돌아다니며 잔뜩 살기가 오른 아줌마들은 6명의 대표를 꾸린 뒤, 루이 16세와 만나서 개인 아파트에서 담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증오할수록 임금에 대한 긍정적인 환상에 사로잡힌 폭도들은 막상 루이 16세를 가까이서 대면하게 되자 프랑스의 군주라는 지위에 압도되어 1명은 기절해서 쓰러질 정도였고, 이후 궁의 베란다에서 루이 16세가 연설할 때는 "임금님 만세! (Vive le Roi!)라고 외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와중에도 군중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불러내라고 요구했고, 이에 황당해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당하게 팔짱을 끼고 베란다에 서자 그녀에게 머스켓을 조준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