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간독 (문단 편집) == 역사 == 간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확답은 없으나, 상서(商書) 다사(多士) 편에 보면 '[[은나라]] 선조에게만 책(册)과 전(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시기엔 이미 [[문자]]가 발명되었고 이를 이용해서 점사의 과정 및 결과를 적은 [[갑골문]]이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감안하면 상대에 이미 간독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후한대 학자 허신의 저서인 [[설문해자]]에서 상형문자로 죽간을 엮은 모습과 죽간 뭉치를 책상에 쌓아올린 모습을 각각 책 책(册), 경전 전(典) 자가 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상대의 기록은 갑골문을 제외한 발견이 아직 보고되지 않았으며, 사실상 죽간이 본격적으로 쓰이던 시기는 [[춘추]]시대로, 전성기는 [[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경)부터 후한대(2세기) 사이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출토된 간독문서 대부분이 이 700여년 사이에 집중된다. 한반도에서는 좀 더 이후 시대까지 사용되었는데, 특이한 점으로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169|성산산성]]에서 지금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 유물 양의 대부분, 40%가량인 245점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함안은 원래 [[가야]] 땅이었지만 목간은 [[신라]]에 막 편입된 [[법흥왕]] 재위기의 것들로, 고대 한국의 지방 지배체제와 조세체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거기에 써 있는 내용은 누가 세금을 얼마나 바쳤는가 꼬리표부터 [[공무원]]의 [[반성문]]까지 다양하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04/0200000000AKR20170104056200005.HTML?input=1195m|##]][[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9974323&sid1=001|##]]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는 [[젓갈]]을 담글 때 현대에 [[유통기한]]을 표시하는 것처럼 언제 담갔는지를 쓴 목간을 붙여 두기도 했다. 즉 현대인의 메모지, 포스트잇 역할을 했다. [[파일:8993820058_1.jpg]] <만화 중국서예사 上>/우오즈미 가즈아키 편저/ 시쿠라 아오이 그림/ 임경택 옮김/ 소와당/ 2009 목간(木簡)은 대나무가 나지 않는 서역 지방 등에서 죽간의 대용으로 목편을 사용한 것이다. 목간은 죽간에 비해 매우 짧다. 한나라 때의 목간은 스타인에 의해 돈황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후 실크로드 탐험을 거듭하였던 헤딘은 중국 스웨덴 공동으로 서북과학조사단을 결성하여 감숙성 북서부의 액제납기(額濟納旗) 지방에서 1만점에 이르는 대발견을 하였다. 액제납기 지방을 옛날에 거연이라고 칭했던 까닭에 거연한간(居延漢簡)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중에는 전한의 연호를 기록한 것이 포함되어 있고, 거기에 예서 특유의 파책(波磔)기법을 사용한 것이 있어서 전한의 예서에 파책이 없다는 통설이 멋지게 뒤집어졌다. 참고로 목간의 경우, 나무로 만든 기록 매체 자체는 동아시아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