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각궁 (문단 편집) == [[대한민국]] 각궁 == * [[한국의 무기]] [youtube(WjgtsGKdhMs)] [[조선시대]]의 일반 습사용 각궁은 [[물소]]뿔, 산뽕나무, 대나무, 참나무(대림), 벚나무껍질(화피단장), 소의 힘줄(고래 힘줄로 만든 각궁도 존재), [[민어]] 부레 풀 총 7재로 제작하며, 전투에 사용되었던 전시용 각궁은 대나무를 뺀 6재를 쓰며 옻칠을 하고 매우 두껍게 만들어 내구성과 장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갑오개혁 이후 전통 군사용 국궁의 제작기술은 모조리 실전되었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습사용 각궁이다. 그 외에 사슴 뿔을 쓴 녹각궁, 황소 뿔 3개를 이어 만든 향각궁,[* [[고구려]] 하면 생각나는 수렵도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렵을 하는 무사가 당기는 활을 잘 살펴보면 활의 줌통과 고자 사이에 묶음이 하나 더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맥궁이 향각궁의 형태였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백색 알비노 뿔을 사용한 백각궁[* 당연히도 백각은 매우 귀했기에 주로 고위층이 쓰던 것이다.] 등이 있으나,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는 것은 거의 물소 뿔을 사용한 흑각궁 뿐이다. 사실 녹각궁이나 향각궁은 조선 시대에 물소 뿔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서 대체품으로 삼으려고 했다가 실패한 사례에 가깝다. 우선 녹각궁의 경우 사슴 뿔 역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어 완전히 대체하기 어려웠다. 향각궁은 물소 뿔에 비해 황소 뿔이 짧아서 뿔 셋을 이어 붙여 써야 한다는 점,(물소 뿔은 양쪽에 하나씩 총 두 개면 끝.) 흑각궁처럼 여름이 되면 부레풀이 습기를 먹어 활채가 더 쉽게 부러지거나 떨어져 버린다는 점, 강도가 물소 뿔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 농사를 짓는 데 매우 중요한 소를 잡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쓰기가 어려웠다. 성능이나 제작 편의만 놓고 따지면 흑각궁이 제일임에도 향각궁이 꽤 널리 쓰였다는 해석도 있다. 녹각이나 흑각에 비하면 수급이 압도적으로 쉬웠고, 어차피 쇠심줄이나 아교 때문에 활을 만들기 위해선 소를 잡아야 했으며, 흑각만은 못할 망정 소뿔이라도 대서 만든 활과 그렇지 않은 활 사이에 성능 격차가 크게 존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파운드 수만 크다고 센 활이 아니라 활몸이 가진 탄성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화살의 운동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고, 짧은 활을 길게 당기는 재료의 곡률이 큰 조건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어야 좋은 활인데 당대에 구할 수 있던 재료 중 이런 조건을 가장 잘 만족시키는 건 그래도 소뿔이었다. 한반도에 물소가 없는 탓에 조선 초기부터 물소 뿔을 중국, 일본, 류큐 등지에서 수입했지만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았고 특히 후기에는 [[청나라]]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전략 물자로 취급하여 반출을 제한하였다. 때문에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향각궁이니, 녹각궁이니 하는 것도 수입물자를 대체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던 셈. 결국 세조 7년(1461년) 일본에서 물소 암수 한 쌍을 보내와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는데 [[성종(조선)|성종]] 때까지 무려 70여 마리까지 불어났다고 한다. 기후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오히려 번식은 순조롭게 이뤄져서 중종 성종 24년(1493년)부터 방목하던 물소를 아침저녁으로 농사 일에 쓸수 있게 훈련을 시키기 시작하는 등 본격적으로 물소를 민간에 보급시키고 농경에 투입시키려 들었다. 처음에는 물소를 이용한 밭갈이가 익숙치 않아 1497년에 [[연산군]]이 각도 감사에게 물소가 밭갈이에 익숙하지 못하다며 밭갈이 여부를 확인하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였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ja_10306024_002|#]] 이후 1510년에는 물소로 밭을 갈았더니 보통 소보다 4배의 효과를 보았다는 기사로 보아[[http://sillok.history.go.kr/id/kka_10509027_001|#]] 물소를 기르는데 어느정도 유효한 성과를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어느정도 물소뿔을 자체 조달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마침 1583 [[니탕개의 난]] 1592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기존에 잘 쓰던 화포와 그 소형화/개인무장화 차원인 조총 등 "화력 강화" 쪽으로 관심이 쏠리면서, 각궁에 예전보다 큰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조총은 화약과 총기 생산만 잘 갖추면 쉽게 방아쇠를 당겨 사격연습할 수 있는 반면에 활과 화살은 당시에도 귀중한 나무와 비싼 물소 및 화살의 깃을 만들기 위한 재료 등의 생산량이 후달리고 무엇보다 훈련도 힘들었다. 일단은 사람의 힘으로 쓰는 것보다 화약을 이용해 날려 버리는 것이 더 편하니 사실상 조총이 더 위력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조총이 말처럼 다루기 쉬운 물건은 아니다. 퍼커션 캡 도입 이전의 화승총은 취급도 사격도 쉽지 않았고, 이는 폭발이나 화약 가격 등 위험하다+어렵다+비싸다(연습할 기회가 적다) 가 겹쳐지며 비숙련자가 다룰경우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패배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조선군도 이걸 알아서 실사격은 탄환과 화약을 아끼느라 자주 못할지언정 장전연습 만큼은 열심히 시키려고 애썼다. 당시 훈련 교재에는 장전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병사들이 실전에서 저지른 온갖 뻘짓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화약을 넣고 탄환을 넣어야 하는 것을 탄환을 넣고 화약을 넣어서 발포조차 못하거나, 탄환을 입에 물고 화약을 재다가 포성에 놀라 탄환을 삼켜버리거나, 화약과 탄환을 단단히 다지지 않아서 조준하자마자 죄다 흘러나오는 등. ]바꿔 말하면 이런 단점을 가진 화승총도 종래의 궁시에 비하면 쉬울 정도로, 궁시를 다루는게 아주 아주 아주 어렵다는 거다. [[개량궁]]이 개발되자 입지를 다소 위협받고 있다. 황학정 국궁 교본에서는 개량궁 등장으로 인해 각궁과는 맞지 않게 활을 배운 궁사들이 각궁을 부숴먹는 일 때문에 대림이 낮아지고 각궁이 점차적으로 개량궁 모양과 비슷해져 전통적인 각궁의 규격이 틀어지고 있다며 개탄하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그 '전통 규격'이란 것도 애초에 조상들이 더 좋게 개량하고 바꿔가며 만든 것'''이니 너무 거부감을 가질 필요는 없고 좀 더 개방적으로 생각해도 된다. 정 우려스럽다면 기존의 옛 방식을 [[아카이브]] 처럼 대대손손 잘 보관해 두면 되고.[* 예를 들면 [[일렉기타]]를 만들 때 필요한 경우 옛 몇 년도식 제작 방법을 다시 꺼내어 만들기도 하듯이.] [[파일:scan4b.jpg]][[파일:106174714_270785247570125_6674334179848859041_n.jpg]][[파일:102557338_259200032061980_8981793303339236526_n.jpg]][[파일:105032385_271017770880206_5034119570925138842_n.jpg]][[파일:87159868cd954aac9ca7435b86e06ff4.gif]] 전통 각궁. 줌통의 실루엣을 결정하는 대림 부분이 요즘의 것 보다 많이 안으로 들어가 있고 고자 부분이 목소에 거의 직각으로 붙어 있어서 평소엔 [[♡|하트 모양(...)]], 활시위를 걸면 '''3자 모양''', 당기면 거의 완벽한 [[직사각형]] 형태를 띄는 게 특징이다. 현대 각궁이 (개량궁의 영향을 받아) 대림의 각이 줄어들어 평소엔 달걀꼴, 활시위를 걸면 평범한 [[리커브 보우]] 모양, 당겼을 때 3자 모양이 나오는 것과 대비된다. [[파일:고구려각궁보관.jpg]] [[파일:104321944_264646428184007_4683907010264876330_n.jpg]] 참고로 이런 전통 각궁 형태는 [[국궁#맥궁|고구려 시대 예맥궁]][* 당시 [[중국]]에서는 [[고구려]]산 [[활]]을 '맥궁(貊弓)'이라고 불렀다.]과 굉장히 흡사하게 생겼는데,[* 예맥궁도 활시위를 걸었을 땐 3자 모양, 당겼을 땐 직사각형 모양이 나온다.] '''이는 한국의 각궁이 고구려 예맥궁의 직계 후손임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각궁을 생산하고 있으며, 대한궁도협회의 가격 제한을 따라 60만원을 넘기지 못한다. 따라서 30~45만원 내외의 보급형 각궁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딱히 남는 장사는 아니라고 한다. 라디오에 출연한 12대째 각궁을 만들어 온 장인의 말에 따르면 60~70만원인데 '''재료가 비싸서 별로 남는 게 없다'''는 모양. 소 힘줄, 소 뿔은 말할 필요가 없고 [[민어]] [[부레]]도 생각보다 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2011년 충주무술축제에 전시된 송무궁의 각궁은 120만원이었고 다른 업체들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비공인 궁방의 각궁으로 비공인 궁방은 궁도협회의 가격에 매이지 않는다. 대회에 들고 나갈 수 있는 공인 궁방의 각궁은 여전히 55만원으로 동결되어 있다. 그러니 대회 따위 관심 없다면 비공인 궁방에서 본인에게 맞는 제작을 웃돈을 주고서라도 제작하는 것이고 대회에 관심이 있다면 공인 궁방으로 가서 맞춰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