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각궁 (문단 편집) == 개요 == 각궁(뿔활, horn bow, 角弓)[* 말 위에서 쓸 수 있는 작은 활이라 하여 마상궁(horse bow)로 부르기도 한다.]은 합성궁(컴퍼짓 보우, composite bow)의 한 종류로, [[나무]]와 [[힘줄]] 외에 [[뿔]]을 주 재료로 추가한 [[활]]을 가리킨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뿔로 만든 활을 뜻한다.] 위로 늘어지는 부분인 활의 바깥쪽에 탄력이 강한 힘줄(심)을 놓고, 안쪽에는 반발성이 강한 뿔을 이용하여 매우 강력하고 먼 사거리를 갖게 된다. 이러한 합성궁 기술은 일반적인 목궁에 비하여 첨단 무기로 여겨졌다. 각궁은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위력을 확보할 수 있고, 장력이 적어 조준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나 양손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멀어[* 활에 따라서는 당기는 손 어깨 너머까지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정확히 조준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고, 기후에 따라 완전히 못 쓸 물건이 되기도 하는 등 단점이 있었다.[* 이는 유럽의 [[쇠뇌]]도 마찬가지였는데, 철갑상어 입 천장을 아교 재료로 사용하여 만든 유럽의 (합성궁채) 쇠뇌들은 비만 오면 파손되기 일쑤였지만 각궁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재료와 종류에 따라 비가 와도 쓸 수 있었지만, 각궁처럼 백이면 백 습기에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재료가 제한적이었다는 점이 크다. (중세 중기쯤 되면 합성궁채는 거의 도태되고 강철을 쓰는 강철궁채가 주로 남았다.)] 구조에 대해서 살펴보면, 각궁류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은 탓에 드로 웨이트(Draw weight)도 작고, 길이에 비해 드로 렝스(Draw length)가 길다. 그래서 드로 웨이트를 보충해주기 위해 리커브 보우 형태로 만들어 준다. 이렇게 하면 초기 장력이 0인 롱보우에 비해 초기 장력이 어느 정도 붙은 상태에서 당길 수 있으므로 전체 에너지 면에서 유리하다. 또한 드로 렝스가 길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목궁용 화살에 비해 화살의 길이가 길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문제를 도구를 통해 짧게 줄여 시속을 극단적으로 높인 것이 [[애기살]]. 반면 영국이나 일본의 [[장궁]]은 큰 드로 웨이트를 확보하기 위해 활의 형상이나 재질을 바꾸기보단 크기를 늘리는 쪽을 택하여 장력과 크기가 무지막지한 활이 나왔다. 그러나 재질 때문에 리커브가 아니라 직선형에 가까워 장력이 0에서부터 시작하고, 크기 때문에 시위의 각도가 과도하게 크기 때문에 힘을 전달하는 효율성은 떨어진다.[* 평행사변형법으로 합력을 측정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따라서 일본의 장궁은 궁수 본인보다 더 큰 2.2m으로, 즉 지면이라는 한계 때문에 아랫장보다 윗장을 더 크게 만든 기형적인 형태까지 확장했으면서도, 실질적 유효사거리가 30m 내외인 반면, 각궁의 유효사거리는 140m이고 기록에 따르면 잘 쏘면 최대사거리 200m도 거뜬히 넘기는 궁수도 있었다고 한다. [* 원거리 사격 수단의 기술적 제한 때문에 전국시대 일본은 일본 소녀들을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팔아치워서라도 서로서로 조총과 화약을 빨리 단번에 더 많이 수입해서 군비 경쟁해서 서로 죽이려고 난리였던 것이다. 워낙 일본의 백성이 팔려나가는 노예무역이 극심해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금지령까지 내려야할 정도. 물론 일본인들 말고 이제 외국인들만 납치해서 팔아버려라는 소리였지만, 이런 법령 또한 회피하려고 동남아를 시작해서 20세기초까지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해외 매춘굴에 일본 소녀 [[가라유키상]]을 보내 포주짓을 해서 각종 전쟁자금과 나라 발전기금을 강제로 벌어들이게 한다. [[메이지 유신]] 기간 동안만 한정하더라도 이렇게 포주짓으로 희생된 일본 소녀들만 30만명이 되어, 벌어들인 비싼 외화도 어마어마한지 일본의 위정자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1만엔 최고액권에 실리는 유신지사들까지 가라유키상이라는 속된 말보다 "죠시군(낭자군)"라며 '''국가기간 사업으로 칭송했다.''' 사실 가라유키상도 히데요시 이전, 중국인 왜구 두목 [[왕직]] 휘하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조총 조기 도입 사업의 자금줄로서 [[오다 노부나가]]가 유행시킨 장본인이지만. 자세한 건 항목 참조.] 한국에서는 [[고구려]] 시대의 유적에서 이미 각궁의 활채가 출토한 바 있으며, 재료는 소의 갈비뼈를 사용했다. 반면 [[몽골]] 지역에서는 활에 산양이나 염소 뿔을 주로 사용했다. 고구려의 경우 [[동명성왕|건국 시조]]부터가 [[활]]로 유명하기도 한 인물임과 더불어[* [[부여]]의 [[동명왕|건국 시조]]도 비슷하다.] 222년(산상왕 26) [[고구려]] [[산상왕]]이 [[오나라]] [[손권]]에게 황제 즉위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각궁을 선물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활]]을 단순 제식무기일 뿐만 아니라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로 활용할 정도로 특별한 의미를 담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북방민족의 영향을 받아 현재 물소뿔을 붙인 흑각궁(黑角弓)이 [[조선 시대]] 대표적 활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흑각궁은 핵심재료인 물소뿔을 전량 수입해야 했다. 이 때문에 명과 청에서 공무역을 하기위해 노력하였고 후반기에 들어서는 계를 설립하여 일본에서 수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15세기 화약무기 발달과 명,청에서 물소뿔 수출 금지 등으로 인해 점차 흑각궁의 숫자는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물소뿔을 자급자족을 시도했지만 야생화된 물소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례가 나왔고 대다수의 소가 가축화에 실패하여 결국 중종때 사육을 포기하고 물소 뿔을 수입했다. 한편, 소뿔은 향각궁으로, 물소뿔은 흑각궁으로 불렀다. 이외에도 철로 만든 군용 [[철태궁]] 등 여러 종류의 활이 있었으나, 현재는 흑각궁만이 제작법이 전해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