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군사정권 시절 === 조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박해를 받았던 구한말과 저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행위]]를 벌이기도 했던 [[일제강점기]], 그리고 [[4.19 혁명]] 전까지 극렬 보수 반공적인 모습을 보이던 한국 천주교가 변화된 모습을 보인 것은 군사독재 시절로 평가된다.[* 한국 천주교가 사회 현실에 눈을 돌려 적극적인 사회 참여에 본격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66년에 일어난 강화 심도직물 사건이다. [[인천교구]]장 [[나길모]] 주교는 담당 교구장 주교로서 당시 가톨릭 노동청년회 총재 주교였던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주교와 함께 앞장서서 사건을 해결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교회는 자유민주주의를 긍정하기 시작했으며,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촉구하였다.], 천주교는 과거보다 더 민중 친화적이면서 사제들의 사회운동 참여도 더 적극적으로 변한다.''' 정교분리를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가톨릭 쪽이 정치 권력의 눈치를 덜 볼 수 있게 되었고, 군사독재 아래에서 탄압을 받는 민주주의, 인권을 거론하며 정부와 큰 대립각을 세운 점이 한국사회에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다. 교회와 정부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초는 1971년 12월 24일 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전국으로 생방송되던[* 1990년대 초반까지 성탄절 종교 행사는 전국에 생중계되곤 했다. 12월 24일 밤 명동성당의 성탄 미사나 12월 25일 낮 영락교회의 성탄 예배가 대표적이다.] [[주님 성탄 대축일|예수 성탄 대축일]] 자정 미사 강론 도중 '''"[[10월 유신|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결코 유익한 일입니까?"'''라며 돌직구를 날린 것으로 본다. 격분한 [[박정희]] 대통령이 KBS에 전화를 걸어 방송 중단을 지시했고 성탄 미사 생중계는 중단됐다.[* 그리고 미사를 생중계하던 프로듀서 등 방송국 관계자들은 [[중앙정보부|남산]] 관광을 했다고 한다.] 아무리 서슬 퍼렇던 시절이라도 차마 [[바티칸]] 시국의 시민권을 가진 [[추기경]]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했는지 교황청에 김수환 추기경의 직위해제를 요구했지만 될 리가 있나. 교황청은 이런 협박을 쿨하게 무시한 다음 [[김수환]] 추기경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려주었다고 한다.[* 훗날 6월 항쟁 당시의 태도를 보면, [[김수환]] 추기경 본인 또한 이 일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당시 군사정권과의 갈등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대표적으로 [[10월 유신|유신헌법]] 체제인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가 체포되었던 사건,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을 선교회와 외국 언론을 통해 세계에 폭로한 것을 빌미로 메리놀외방전교회 소속 시노트(한국명 진필세) 신부가 강제퇴거당한 사건 등이 있으며,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안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정의구현사제단]]도 이때부터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박정희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공개적인 갈등을 빚었지만 가톨릭 자체에 대한 태도는 의외로 호의적이어서 차녀 근혜를 가톨릭 미션스쿨인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으며 종교를 가졌으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발언이 훗날 소개된 적까지 있다.[* 또한 박정희 본인이 [[육영수]]와 2번째 결혼식을 치른 곳은 다름아닌 [[계산성당|대구 계산성당]]이다. 다만 박정희와 육영수 모두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다. 결혼 당시 한국전쟁 중이었고 대구시내에 적절한 결혼식장을 찾지 못해 계산성당에서 식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근혜]]는 공식적으로는 무종교라고 하나 [[성심여자중학교]] 재학 중에 세례성사를 받기는 했고(세례명 율리아나) 불교에서는 수계를 받은 적은 있다. 또 개신교 신학대학원에도 다녔고, 이슬람 사원에도 기웃거렸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박정희 정권보다는 직접적 대립은 적었던 것 같지만 오히려 군사정권의 막장성은 전보다 더 심해진 모습을 보이게 되고 교회는 더 큰 대립각을 세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방한 당시 첫 공식 행사로 [[5.18 민주화운동|광주광역시]]를 방문하였으며, 미사 집전을 위해 무등경기장으로 가는 경로로 금남로와 전남도청[* 당시 [[광주광역시|광주]]와 [[전라남도|전남]] 지역 신자들은 미사 참례를 위해 대부분 무등경기장에 모여 있었던 만큼 금남로와 광주도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해준 인파는 천주교와는 관계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을 거치도록 강력히 요구해 관철시켰던 점과 아래의 저 명언이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을 정부 관계자들이 추기경에게 협박하던 상황에서 나온 것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6·10 민주항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시위 주동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피신하고 있던 [[명동성당]]으로의 공권력 투입이 임박할 때 김수환 추기경이 남겼던 말은 역사적 명언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제가 하는 말을 정부 당국에 전해주십시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 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 >---- >[[https://aos.catholic.or.kr/bbs43151/13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4. 6월 민주항쟁(상)', 평화방송·평화신문, 2004. 사회 전체가 군사정권 아래 숨죽이고 있던 시절, 그와 여러 사제들의 용기 있는 언행이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앞서 말한 자발적인 신앙 전래, 박해 수난사와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 중 하나다.''' 이렇게만 보면 가톨릭이 진보적인 종교라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가톨릭]] 문서에도 있다시피 가톨릭은 '''교리적으로 따지고 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종교다.''' 타 종교에 관용적인 자세와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모습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들과 각 나라 주교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