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 === >국가에 대하여 애국적 행동을 함은 천주 엄금하신 죄악이라는 이유로 적국의 손에 잡힌 군사가 만고 중에 죽을지라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지켰으면 이는 국가의 충신임은 물론 천주대전에도 훌륭한 순교자가 될 수 있다. >---- >1941년, 경향잡지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체제순응적 종교가 그랬듯 '''진정한 복지부동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 반민족 행위]]를 보여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 '이는 정치적인 일이니 막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 신사참배 자체가 [[교황청]]에 의해 허용된 것은 1936년의 일인데, 교황청이 허용하지 않던 시기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신자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밀고하는 등, 추악함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다만, 신사참배에 대해서는옹호할 여지가 없지는 않다. 일본 신사참배는 중국식 제사와 함께 교리적으로 논의되던 사항이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종교적 지향점 없이 전통적이거나 국가적 의례 등의 이유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관점이 강해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신자가 중국식 제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황청의 관점도 어느날 갑자기 바뀐 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천주교회의 관점을 교황청이 옳다고 보증을 서준 것에 가깝다. 즉 정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종교 본연의 입장에서 보다면, 중국식 제사를 허용한다면 일본식 신사참배도 허용하여야 했다.] 외국인 신부들이 개별적으로 조선인을 도와준 사례가 종종 있긴 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카미유 부이용]] 신부(한국명 임가밀로), [[앙투안 공베르]] 신부(한국명 공안국) 등], 어디까지나 외국인(서양인)으로서의 개인적 영향력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민족운동을 하는 성직자들에게 국가의 일에 개입하지 말라며 경고를 주거나 대놓고 징계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아들을 신부로 키우려 했던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교회 차원에서 애써 외면하였던 사실'''도 었었다. 1972년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하게 봉헌되는 등, 안중근 의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 자체는 예전부터 많이 이루어졌지만, 교회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건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교회 지도자인 주교들이 거의 대부분 서양인들이었던 일제강점기 때는 '''아예 대놓고 무시'''하기도 했으며, 8.15 광복 후에도 한동안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그저 교세 확장에만 몰두하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제8대 조선→경성대목구장.]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 천주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제사 문제로 박해를 당한 영향으로 인한 조선말 왕정에 대한 앙금도 있겠지만 이는 너무나도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을 포기한 처사였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의 가톨릭을 친일'''적이라면서 비판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것은 [[신민회]] [[105인 사건]]이다. 제8대 경성대목구장이자 가톨릭의 지도자이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안중근 일가족과 가깝게 지냈으며 사형 직전의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나, 그 때문에 2개월간 명령 불족종으로 미사 집전을 금지당한 [[니콜라 빌렘]] 신부에게 후술할 정보를 알게 되었다.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사촌동생 [[안명근]] 야고보로부터 '조선인들이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암살을 꾀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 야고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것을 눈길을 헤치고 가서 일본군 아카보 장군에게 '''밀고'''하여 [[http://well.hani.co.kr/?document_srl=13721|이것이 105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대해 니콜라 빌렘 신부가 고해성사를 누설한 것이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는 1차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TV 드라마의 고증오류'이다. 물론 고해성사 누설이 아니다 뿐이지 윤리적 논쟁은 따르겠으나, 최소한 고해성사 누설이라는 건 루머이다. 자세한 건 [[니콜라 빌렘#s-3|니콜라 빌렘]] 문서 참고.] 아래의 사건사고 문단 참조. [[3.1 운동]] 또한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감시와 탄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던 종교계가 주도한 독립운동이라 민족대표 33인이 전원 종교계 인사들이었다. 이 중 [[천도교]]와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었고 불교[* 당시 한국 불교 또한 주류는 가톨릭과 다름바 없는 친일 일색이었고, 일본 불교로 흡수될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 역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이 참가했지만 천주교는 단 1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가장 큰 원인은 제10대 서울대목구장이자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등장 전에는 한국 천주교의 대표격인 경성-서울대목구장이 외국인이어서 민족운동보다는 교회의 교세 유지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주교 노기남은 진작에 [[창씨개명]]을 한 주교였다. '오카모토 가네하루'. 1940년 조직된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의 이사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취임사에서도 종교보국 무언복종을 강조한 일제에 협력한 종교인이었다. 참고로 1942년 [[장로회|장로교]]가 애국기 헌납 기성회를 통해 전투기 1대 값을 바치고(조선장로호), [[감리회|감리교]]가 1944년 전투기 3대 값을 바칠 때(감리교단호) 가톨릭은 미영격멸 비행기 200대 헌납운동을 전개해 248대분인 '''2,481만원'''을 일제에 헌납했다. 이는 당시 풍전등화와 같던 교회의 운명을 보존하려는 교황청의 노력과 맥락을 같이 하기는 했지만, 당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를 강력히 비판하는 회칙을 반포한 교황 [[비오 11세]]나, 표면상으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비밀리에 나치의 눈을 피해 유대인들을 구제하려 노력한 교황 [[비오 12세]]의 행동과도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내내 보여준 이러한 친일행각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개신교로 개종했다는 설도 있고, 이때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이후 군사독재 시대 민주화 운동에서 천주교가 종교계에서는 가장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철저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교분리]])이긴 했다. 다만 교회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닌, 군국주의 국가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문제였다. 몇몇 교구에는 아예 본당에 일본 헌병이 들어와 사제들에게 "입대하세요. 주님의 뜻입니다." 따위 소리까지 당당하게 지껄였다고 할 정도였다. 위의 이유 외에도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탄압을 했던 병인박해 등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있던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탄압을 가했던 나라를 굳이 독립시킬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도 간도지방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했던 의민단 등 평신도 차원에서의 독립운동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교회 지도부의 일제강점기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하였다.[[https://www.cpbc.co.kr/CMS/news/view_body.php?cid=746550&path=20190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