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대한민국 (문단 편집) === 교회의 시작(조선 후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hjh0820201402102201520.jpg|width=100%]]}}} || || '명례방 신앙집회', 김태, 1984, 명동대성당. || 조선에서의 천주교는 특이하게도 외국인 선교사의 노력으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학문으로 배우고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는 가톨릭 역사상 전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다. 이는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가 여의도 광장에서 천주교 순교자 103명을 성인으로 모시는 시성식을 주례하며 "1784년에 여러분들의 조상들은 자신들 중 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좋은 씨앗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가톨릭 공동체였으며, 이 공동체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완전히 일반 신도들에 의해 시작된 유일한 공동체로서 독특합니다"라고 언급한 점으로도 증명된다.[[https://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homilies/1984/documents/hf_jp-ii_hom_19840506_martiri-coreani.html|#]] 천주교는 처음에는 신앙보다는 [[서학]]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학문으로 들어왔다. 가톨릭이 이처럼 독특하게 조선에 전파된 이유는 [[실학]]과 관련이 있다. 당시 [[성리학]]에 한계를 느낀 몇몇 조선 실학자(선비)들이 서양 학문을 배워오는 과정에서 가톨릭도 전해졌기 때문. 정확히는 17세기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西學)'으로 소개되었고, 18세기 후반 [[이벽]] 등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에게 처음 [[신앙]]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에 들여온 책이 [[마테오 리치]] 신부의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였고, 조선에선 그가 한문으로 지은 것을 언문(한국어)로 번역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되었다. 즉 초기에는 서학(서양의 학문)으로서 몇몇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던 것. 때문에 이 시기에는 천주교가 아닌 '''천주학'''이라는 용어를 썼다. 이 천주학 연구모임을 지금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14020|명례방 공동체]]라고 부른다. [[역관]] 김범우 토마스가 자신의 집을 모임 장소로 내주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 집터를 매입하여 세운 건물이 다름 아닌 현재의 [[명동성당]]이다. 하지만 모여서 서적을 읽고 천주학에 대한 연구/토론을 거치면서 교리를 습득하고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생겨났다. 정식으로 [[사제]]가 파견되기 전까지는 교인들 사이에서 임의로 [[주교]]와 [[신부(성직자)|신부]]를 뽑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통해서 신앙활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교회법상 허용되지 않는데[* 원칙대로라면 그 자체로 파문에 이르는 큰 문제였으나, 선교사가 파견된 적 없는 나라의 신자들이 그걸 알 턱이 없었으므로, 당시 가톨릭 측에서는 이를 고려해 경고 조치를 주는 것에 그쳤다. 훗날 이 사례는 한국은 선교사 없이 가톨릭을 받아들인 유일한 나라로 기록되게 되었다.], 초기 신자들도 이를 나중에야 알게 되어 부랴부랴 베이징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ukjungbak_13.jpg|width=100%]]}}} || || 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성경 해설서, 성경직해{{{-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된 역사상의 인물들은 [[정조(조선)|정조]] 1년인 1777년에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권철신 암브로시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와 권철신의 매부인 [[이벽]] 세례자 요한, 그리고 유명한 [[정약용]] 사도 요한과 [[정약전]] 안드레아,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3형제가 있다. 특히 권철신은 40여 차례에 걸쳐 충남 예산군의 홍유환과 연락하여 천주교 전파에 대해 논의하는 등 열성적인 활동을 보였고 이 덕분에 남인 계열 인물에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1784년 2월경(음력 1월) 최초의 영세자, 즉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 사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신자에 대한 재인식 등으로 인해, '최초의 신자'라는 호칭은 흔들리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타 쥬리아]] 사례처럼 이들은 조선 사회에서 뿌리내리진 못했기에 공식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이 [[이승훈 베드로|이승훈]] 베드로가 받은 세례성사에서 시작되었음은 부정되지 않는다.] 인정받은 [[이승훈 베드로|이승훈]] 베드로는 베이징까지 가서 프랑스 [[예수회]] 소속이던 장 조제프 드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신자도 세례를 줄 수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임종이 가까운 환자처럼 급박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되며, 이마저도 완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영세자의 상태가 호전된 뒤에 반드시 충분한 보충 교리를 받고 사제에게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례성사]] 참조. 즉 당시 조선의 특수한 상황에서 행한 것. 이후 베이징 교구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최초로 [[조선]]에 몰래 들어와 전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1831년 9월 9일에는 조선 천주교회가 중국 베이징 교구에서 분리되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다. 천주교의 교리와 사상이 성리학을 위시로 한 유교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았고, 이에 따라 충돌과 박해가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익과 안정복을 시작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영조]] 34년인 1758년에 결국 천주교에 대한 제재령이 내려졌는데, 천주교 자체에 대한 금지라기 보다는 사당을 허물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제재를 했기 때문에 박해라고 보기는 어려운 편이다. 가톨릭은 조선에 들어온 후 크게 4번, 즉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이때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에 걸쳐 [[조선의 천주교 박해|모진 박해를 받았다.]] 물론 크게 피바람이 분 것만 4번이었다는 이야기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박해와 처형들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가 혹독했는데 이때만 최소 8,000여 명~최대 20,000여 명이 순교하였을 거라 추정될 정도로 조선의 박해는 매우 가혹한 것이었다. 다만 가톨릭 신자라도 주교나 신부 급이 아닌 이상 평신도는 말만으로도 배교하겠다는 뜻을 나타내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조정에서도 이를 권고했다. 예를 들어, 사또가 "네가 천주교를 버리겠다고 말만 한다면 살려주겠다" 라고 여러번 기회를 주는 식으로. 이는 단순한 형식주의나 온건책이 아니라 분명히 [[배교]]의 효과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방침을 세운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정조가 '거짓으로라도 배교하겠다고 말한 순간 10년 공부(신앙)가 햇빛을 받아 녹아내린 얼음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6|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 [[전향]]이나 [[인지부조화]] 문서에도 나오듯이, 아무리 형식적이고 거짓으로 한다 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을 부정하는 행동 자체 만으로도 그 신념에는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데. 이는 신앙도 마찬가지 였다. 특히 가톨릭 신자와 사제들 모두 신체적인 고문과 처형으로만 일관하던 도쿠가와 막부도 배교자들[* 특히 신부인 크리스토방 페헤이라(Cristóvão Ferreira)나 주세페 키아라(Giuseppe Chiara)도 있었다.]의 조언을 받아들어서 무작정 고문을 가하기보다 [[후미에]]를 포함한 정신적인 압박으로 배교로 유도하고 그래도 정 안될 때 사형으로 전환했던 걸 보면, 조선 조정에 가톨릭에 대해서 정확하게 조언할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통찰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순교를 택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사제들도 "원할 경우 처벌하지 않고 단순히 추방만 하겠다"고 조정에서 권고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하고 순교를 택했다. 최초의 순교자는 김범우 토마스로서, [[https://maria.catholic.or.kr/dictionary/term/term_view.asp?ctxtIdNum=2768&keyword=&gubun=01|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난 1785년 체포되어 고문의 후유증으로 2년 후 순교하였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명례방'의 장소를 제공한 중인(中人)이었다.[* 김범우 토마스의 집은 명례방으로 불렀고, 시간이 흘러서 이 곳은 명동성당이 된다.] 정약용 등은 양반이라서 가벼운 문초 후 방면되었지만, 만만한 중인이라는 이유로 시범케이스로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후반이니, 조선 조정의 박해는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801년 이전 박해의 성격은 순전히 종교 박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 시대에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종교라는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시점에서 종교임을 부정하는 현대의 [[유교]]와는 달리, 과거의 유교는 '진정한 종교는 유교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종교'라는 단어 자체가 과거 유교에서 쓰이던 것과는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인데, 성리학자들이 성리학을 종교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불교 또한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로서의 관념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에 쓰이는 서양 단어 religion의 역어로서의 종교가 아니며 말 그대로 학문이라는 개념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종교라는 개념이 없는데 종교의 자유, 국교, 종교탄압 같은 개념을 적용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남인에 대한 정치적 견제 및 (조정이 해석하기에는) 혹세무민의 사학에 대한 대응이라 봐야할 것이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적어도 정조 시절에는 불교의 일부 종파라고 조정이 여겼으며, 당시에는 그냥 세상이 어지러우니 생겨난 사학 중 하나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윤지충 바오로가 신주를 태워 버리는 [[진산 사건]]이 일어나고, 대규모의 박해인 [[신유박해]]가 터진다. 그 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박해는 더더욱 심해진다. 신유박해 때 순교하여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중에는 아이와 여인들도 있다. 또한 백서 사건 이전에는 박해가 가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병인박해와 비교하면 소규모로 보일 뿐이지 신유박해는 당시로서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박해였다. 상식적으로 남녀노소 사농공상 가리지 않고 300명을 죽인 사건을 소규모 박해라 부르진 않는다. 황사영 사건이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이런 루머가 퍼진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이 백서에 적은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는 내용이 명백한 '''간첩행위 및 반역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적당히 장형이나 귀양으로 끝났을 법한 사안도 얄쨜없이 사형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서는 조선을 일컬어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땅', 심지어 '''"순교하러 가는 곳"'''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살벌함을 짐작할 만하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는 중국, 조선 등으로 파견되는 성직자를 전담하여 관리했는데, 1839년 기해박해 때 처형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3 (제2대 조선대목구장)}}}, [[피에르 모방|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등이 조선 최초의 프랑스인 순교자로서 유명하다. 이중 모방 나 베드로 신부는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양성,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유학 도중 병사하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에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벤 곳이라는 잠두(蠶頭)봉은 그 뒤로 머리를 자르던 산이라 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6년 한국 천주교에서 사들여 성지로 조성하게 되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당산철교를 건너다 보면 철교 북단 동쪽에 바짝 붙어 있는 작은 바위산이 있고, 바위산 정상에 성당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절두산 순교성지다. 아담하게 조성한 야외공원과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있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서 구경할 만하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이후 프랑스가 적대국이 아니게 되어 천주교가 간첩 및 반역행위가 아니게 되었고, 프랑스 측의 요구로 가톨릭을 선교할 수 있게 됨으로써 [[포교#s-1|포교]]가 허락되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박해 때 싸그리 다 죽었고, 개항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교난을 겪으면서 진통을 겪는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한국전쟁이 벌어질 때까지 대부분의 시골에서는 양반-상놈 체계가 잘만 유지되었음을 상기하자. 국가에서 탄압 해제를 선언했다고 해도, 깡촌에서는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구타, 약탈, 강간,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이렇게 100년 동안이나 계속된 박해의 후유증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또한 프랑스 등 유럽에서의 전교 지원 또한 미미하여 미국을 앞세운 개신교에 세력이 밀리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혹독한 박해를 겪고도 자생하여 교회를 유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일본만 해도 황사영 백서 사건과 유사하게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고, 가혹한 박해를 받은 뒤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이다. [[카쿠레키리시탄]] 문서 참조.]시킨 역사는 바티칸 등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박해당한 신자들은 [[복자]]나 [[성인(기독교)|성인]]의 대열에 들어가기도 하였는데, 특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여의도광장에서 당시 순교자들 중 '''103명을 한꺼번에 성인으로 시성'''한 것도 이러한 평가가 배경에 깔린 것이다. 복자나 성인으로 추대되려면 [[교황청]]에 의해 한명 한명 지루할 정도로 철저한 심사를 거쳐 추려 낸다는 점에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103명은 아주 굉장한 숫자다. 또한 한꺼번에 시복/시성된 숫자로서도 가톨릭 역사상 최대이며, 시성식 장소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는 것 가톨릭 역사상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 가톨릭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역사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 (즉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을 했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01년 박해의 원인이 된 '''[[황사영 백서 사건]]'''은 지금도 말이 많다. 이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 정약용 본인에게는 조카사위였다. 이 백서 사건 덕에 이루어진 가톨릭 박해로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참수로 순교하고, 세례는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정약전, 정약용까지 18년씩이나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것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보내달라고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고작 2천 명도 안 되었음에도 그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 병력이 침략하면 조선은 임진왜란급 전란에 시달렸을 것이다. 물론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유럽 각지와 멀리 아이티를 비롯한 곳에서 싸움을 벌이느라 조선에 이 많은 병력을 보낼 형편은 못 되었지만, [[병인양요]] 급의 파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황사영 백서는 [[의금부]] 관리들이 보고서를 올린 뒤 백서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면서 내용이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3 (제5대 조선대목구장. 병인박해 때 순교, 1868년 [[복자|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때 [[시성]])}}}가 조선 가톨릭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들이 병인박해와 같이 이 사본의 내용을 들먹이면서 [[병인양요]]의 명분이 되었으니 기어코 조선에 전란을 가져오게 했다. 약 1천여 명의 사상자 및 규장각 서고를 비롯한 무수한 문화재를 프랑스가 약탈하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 셈이다. 당시 실권자인 벽파들이 천주교 박해에 크나큰 명분으로 삼아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안동 김씨]]의 당시 실권자이자 시파인 [[김조순]]은 "천주교인에 대한 대규모 처형은 민심을 요란하게 만든다"고 보류했는데,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들이 "천주쟁이들이 크나큰 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김조순에게 거듭 간청하다가 이 백서 사건이 드러나면서 제대로 기회를 잡았다. 결국 온건책을 쓰던 김조순도 백서 사건을 전해듣고 충격과 공포에 빠져 결국 강경책을 쓰게 한다. 결국 황사영은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었다. 나아가 지방 유생들 등 '가톨릭은 양놈 군대의 침략을 권유하는 사교'라는 전국적인 인식이 퍼져 가톨릭 혐오에 이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로 인해 그를 순교자로 기리면서도 천주교회에서는 황사영의 이러한 외세의존적인 태도를 비판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굿뉴스 홈페이지 가톨릭대사전에는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4057&keyword=%C8%B2%BB%E7%BF%B5&gubun=01|실려 있다.]] 다른 수치스런 역사로는 100년 후 벌어진 1901년 [[신축민란]]이다. 제주도에서 프랑스인 신부를 주축으로 행패가 워낙 심했기에 제주도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제주도 내 가톨릭인 300여 명을 살해할 정도로 그만큼 반감도 장난 아닌 걸 알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수]] 문서 참조. 100년 가까이 묻힌 이 사건은 1999년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잠깐이나마 알려졌다. 당시 이 영화를 "반가톨릭 영화로 봐야 하는가?"라는 등의 논란이 가톨릭 내에서 있었다고. 제작비 40억원으로 만들어 5억원 남짓 벌어들이는데 그친 흥행 실패 말고도 평도 매우 나쁜 작품으로 괜히 묻힌 게 아니니 찾아서 볼 필요는 없다. 그 외에도 개화기 시절의 외국인 신부라는 특권을 남용하여 조선 관청에 난입하여 죄수를 탈옥시키고 주민들을 폭행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고도 신부들이 대놓고 천주교 신자를 옹호하는 등, [[구한말]]의 천주교는 매우 안 좋은 쪽으로 기록을 계속 남겼다. 그러나 2011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안중근]] 토마스 의사 등 551명을 추가로 시복시성하겠다고 나섰는데, 여기에 황사영과 신축민란 때 사망한 교인 중 24명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1/01/2011110100082.html|포함되어 있어]] 비판을 받았다.[* 참고로 개신교에서도 조선인들을 죽인 무장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호]]에 탑승하여 조선에서 효수된 미국인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를 순교했다며 '토마스 교회'를 세우고 찬양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선 개신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다.] 이에 대한 천주교계 내부에서의 반발까지 거셌는지, 결국 황사영과 신축민란 때 죽은 교인 중에 누구에 대해서도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시키지 않았었다. 그러나 천주교계에서 신축민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반성하는 데에 비해서 황사영에 대해서는 상당히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 사실이며, 시복시성도 추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동학]]도 교리 때문에 천주교의 이단 중 하나라고 유교 지배층들에게 탄압받은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참고로 2014년 8월 16일에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1차 시복(124명)을 했고,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 제2차 시복시성(133명),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81명), 총 214명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황사영(본인), 황심 신축민란으로 숨진 사람(1명), 한국전쟁 중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된 사람들이 [[http://www.koreanmartyrs.or.kr/sinang_list.php|포함돼 있다.]] 단, 김건순, 김한빈, 정약용, 정약전, 이재수, 안중근 등은 없다. 이에 대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종교인)|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는 "현재 기초자료 수집 단계에 불과하며 앞으로 10여 년간에 걸쳐 진행될 사안"이라고 말했다. 특히 신학적 측면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화해, 더 폭넓은 신앙적 시야가 필요한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이라고도 [[http://www.koreanmartyrs.or.kr/bbs/board_view.php?bbs_code=bbsIdx7&sub_code=&bbs_number=99|말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수난사,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과 더불어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자발적인 신앙의 수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의 이런 독특한 천주교 역사에 대해 언급했다.[[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date=2014081620&rankingSectionId=104&rankingType=popular_day&rankingSeq=1&oid=003&aid=0006019136|#]] 심지어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6세]]는 이 사실을 접하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당시 비오 6세는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서 프랑스에 끌려가기까지 하는 등 대단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에게 조선의 이 기쁜 소식은 얼마 없는 위안거리였다고 한다. 크리스트교 교리 자체로 비유하면, 성경에서 나오듯이 (마태복음 18장 12~14절) 성직자와 신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하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마치 목동이 길 잃은 어린양을 찾아 다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조선 천주교는 미처 찾지도 않던 양떼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온 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