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톨릭 (문단 편집) == 문화 == 흔히 [[개신교]]를 믿는 것을 ''''교회 다닌다'''', 가톨릭을 믿는 것을 ''''성당 다닌다''''고 해서 가톨릭에서는 교회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아니다. 가톨릭에서 '교회'라는 용어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나오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교회 건물이 아닌 [[신부(성직자)|사제]]와 신자들의 모임을 일컫기 때문이고, 교회가 모이는 장소가 '성당'이기 때문에 '성당에 다닌다'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가톨릭의 헌법을 ‘교회법’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개신교]]의 경우, [[일제강점기]]만 해도 교회라는 단어를 가톨릭과 같은 용법으로 사용하고, '교회당(敎會堂)', 예배당' 등의 단어를 사용했으나, 이후 용법이 변화해서 현재와 같이 되었다. 물론 [[개신교]]에서도 교리적으로는 교회는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일단 한국에서 성당이라고 부르는 곳에 가서 간판을 보면 '교회'라는 명칭을 쓰는 곳이 더 많다.[* 교세가 급격히 확장된 90년대 이전에 지어진 성당은 "천주교 ○○교회" 라는 식으로 명판이 붙어 있는 데가 많고, 이후 지어진 곳은 주로 "천주교 ○○성당"이나 "○○성당" 같은 명판을 달고 있다. 성당 이름은 행정구역명을 따라 짓는 것이 원칙이다. 다른 지역에 같거나 비슷한 이름인 성당이 이미 있을 경우, "오금동 성 요셉 성당"처럼 [[수호자|주보성인]]의 이름을 넣거나 "수리동성당" 이라고 행정구역명까지 넣어서 다르게 짓는다.] 오늘날에 가톨릭 교회를 [[성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신교]]의 교회와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구분하자면 교회는 개념, 성당은 그 교회가 모임 장소로 이용하는 건축물을 말한다. 해외에서의 가톨릭 교회도 [[성당]](cathedral)이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해외에서 사용하는 cathedral이라는 용어가 교회와 성당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cathedral은 정확히 주교좌 성당, 즉 대성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구 내의 일반 성당들은 그대로 church로 표기한다. 개신교회[* 단, [[성공회]]의 경우 주교좌가 있는 성당을 cathedral라 한다.] 중에서도 과거 대성당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사용하거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교회들에 cathedr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서양의 가톨릭 교회의 경우 제일 붐비는 일요일 오전 10시 교중[[미사]]를 무조건 대성당에서만 거행되는데, 그러다보니 외국인인 한국인들은 대성당의 존재만 알고 있어 서양도 한국처럼 개신교회와 천주교회를 구분하는 걸로 인지하는 듯. 또한 천주교 성당이면 '''어디를 가든지 동일'''한 성경구절과 동일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곳이다. 성당마다 차이가 있는 것은 각 성당의 외형과 규모(크기), [[신부님]]의 강론 스타일, 실내장식의 분위기 등 사소한 것들 뿐이다. (같은 교파라도) [[목사]]나 [[장로]]들의 성향에 따라 분위기가 매우 다른 [[개신교]] 교회와는 차이가 있다. [[개신교]]의 경우 이사를 가더라도 이전까지 다니던 교회를 계속 출석하는 경우도 많고, 이사를 가지 않더라도 교파와 목회자의 스타일 내지는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교인 수평이동]]). 그러나 천주교의 경우 집 근처의 성당에 다니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고, 굳이 집에서 먼 성당에 다닐 이유가 없다. ~~물론 이사간 동네가 이전 동네와 가까울 경우 교구가 다르지만 성당을 옮기지 않는 경우도 왕왕 있다.~~ 물론 [[개신교]]의 경우 교회들마다 따로 헌금을 받아 운영하기 때문에, 헌금 수입의 감소 등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교회 자체적으로도 신자의 이탈을 꺼리기도 한다. 또한 개신교 신자들은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을 받을 때 거액의 [[직분 헌금]]을 내는데, 그런 큰 돈을 내고 나면 다른 교회로 옮기기도 아깝다는 이유도 있다. 가톨릭은 신자들이 교리와 그 권장사항을 따르길 강하게 요청하지만, 신자들이 그 권장사항을 지키지 않는다고 외적으로 [[파문|신앙을 박탈하는 경우]]는 현대에는 많이 없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가톨릭에서 '[[콘돔]]이나 [[루프]], 정관수술 등의 인공피임을 금지한다'는 교리가 있지만, 최소한 [[가톨릭/대한민국|한국 가톨릭]]의 신자들이 콘돔을 사용하든 말든 외적인 신앙생활에서 보이기에는 자기가 대놓고 이 사실을 밝히고 다니지 않는 이상 제재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 단, 이는 콘돔이나 다른 교리위반에 대한 묵인 내지는 허용이 절대 아니다. 이는 외적인 측면일 뿐이고, 실상 콘돔, 루프, 정관수술, 체외사정 등의 인공피임을 한 신자는 [[대죄]]를 짓게 된다. 즉 회개하고 인공피임행위 일체를 그만두지 않는 한 [[7성사]]를 받으면 안되고, 그 상태로는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으며, 또 이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필히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도 [[바오로 6세]] 교황은 1968년의 교황회칙 《인간 생명》을 통해 이를 매우 엄격하게 재확인시켰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공식 가르침에서도 [[http://www.cbck.or.kr/page/dogma_kr.asp?p_code=k4120&seq=23|가족 계획이라는 명목 하에 불임수술과 인공피임을 하는 행위는 죄가 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왜 콘돔 사용을 금하는지 그 뜻에 대해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며, 그 뜻에 따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해성사]]를 할 순 있어도, 현실에서 그런 사유로 가톨릭에서 따로 처벌하는 일은 찾기 힘들며 성당에서 추방되는 경우도 없다. [[파문]]은 옛날에는 분명 신앙 외적인 부분에서도 한 사람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처분이었지만, 현대의 파문은 '''신자가 뉘우치고 돌아올 때까지 일시적으로 교회를 통한 은총을 유보하는 것'''에 가까우며, 파문 결정도 대단히 신중히 하며 나중에 복권될 기회도 충분히 준다.[* 예를 들면 죽기 직전이라면 어느 신부에게든지 회개하고 파문을 철회받아 교회로 돌아올 수 있다. 당연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필수다.] 가톨릭에서는 선교를 권장하고 대단히 중요한 행위로 본다. 단, '''포교행위를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물론 가톨릭도 전교(포교)를 하고, 각종 외방전교회, 교황청 전교회를 비롯한 선교회들도 대단히 많으며, 선교 역사도 대단히 길다. 지정된 [[수도회]]의 [[수도자]](수사/수녀)와 여기서 오래 훈련 받은[* 대략 3개월 이상 교육 과정] 소수의 평신도를 중심으로 해당 교구의 철저한 통제 하에 시행한다. 교육만 성실히 받으면 그 외 자격 조건은 없다. 하지만 대부/대모가 될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을 권하는 편이다(이끌어 오는 사람의 대부/대모가 되는 일이 많으니까). 18세 이하의 청소년도 포교단 할동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긴 하나, 한국의 교육 현실 때문에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곳은 보기 힘들다. 또 개인적 차원의 천주교 전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칭찬받을 덕목이자 준 의무차원으로서 적극 권장한다. 포교와 전도는 분명히 칭송받을 덕목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그것이 곧바로 구원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선교는 좋은 것을 이웃과 '''나누려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참된 복음은 말과 설득보다 모범적인 행동과 [[예수|그리스도]]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신자들의 삶에서 드러내는 '''실천'''이 곧 구원의 길이고 은총이고 선행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천주교인으로 주위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곧 최고의 선교활동 중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신부님도 계신다. 한국 사회에서 80년대 중반 이후 가톨릭 교세가 크게 확장한 데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2번에 걸친 방한과 [[시성식]] 영향이 컸지만, 사회 약자를 돕고 정의로운 일에 나서며,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간접적인 포교가 [[예수천국 불신지옥]] 식의 막무가내식 협박성 포교와 달리 대중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도 있다. 만약 [[십자가]] 짊어지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친다거나, 길거리에서 휴대용 물티슈 나누어 주면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하는 행위가 전교의 전부다라고 정의한다면, 가톨릭 교회는 그런 의미의 전교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전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오 복음]] 28:20)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서 전교를 정의한 [[성경]] 구절을 들자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복음]] 13:35)가 그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다른 종교의 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가령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목사의 자녀와 성당에서 [[혼인성사]]를 올리면서 개신교식의 혼인예절을 하게 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화적 존중''' 차원에서 이들의 예식을 비난하거나 탄압하지는 않으며, 전통 예식이라도 종교적인 의미가 퇴색된 경우에는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지난 시대에 저질렀던 탄압과 무자비에 대한 일종의 반성의 결과. 또한 그러한 문화를 가톨릭 속에 받아들인 것이다.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에는 [[미사]] 중에 [[국악]]곡을 부르는 경우도 있고 [[한복]] 입은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의 상도 있으며, [[아프리카]]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빙글빙글 돌고 춤추면서 야외 [[미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철학]]은 물론이고 [[불교]], [[이슬람]] 등 타 종교에 대해서도 필히 공부하게 되어 있다. 예로 외국에 있는 한인 성당과 한인 절은 서로의 기념일에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예수회]]는 전통적으로 세속 학문과 [[철학]] 연구에 있어 전문적인 학자 사제들을 배출해왔다. 풍부하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전세계 철학도들의 필독서인 철학사 시리즈의 저자가 [[영국]]의 [[예수회]] 신부 프레데릭 코플스톤(Frederick Copleston)일 정도. 그만큼 문화와 학문에 대한 개방성이 [[개신교]]에 비해 매우 크다고 평가된다. [[광주광역시]]의 [[살레시오고등학교]]에서는 실제로 [[철학]]이라는 과목 명으로 학교의 재단인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 [[수도자|수사님]]이 강의하는데, [[개신교]]는 물론이거니와 [[이슬람]], [[불교]], [[유교]]에 대해서도 '''균형잡힌 내용을 담고 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생물''' 과목을 강의하는 교사가 '''[[신부님]]'''이라는 것. 당연히 [[진화론]]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 학교는 지나다니다 보면 전대 교장 신부님이 수레를 끌고 다니며 제초작업이나 나무를 다듬곤 하는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는 조상[[제사]]를 '''조건부'''로 허용한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유교]] 문화권의 조상 [[제사]]는 민속적 관습일 뿐 가톨릭의 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새로이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단, 신위나 신주, 제방은 금하며 사진을 놓는 것만 허용된다. 자세한 것은 [[제사/종교별 입장]]의 천주교 문서 참조. 사진이 없어 제방을 놓아야 하는 경우는 신위(神位)라는 글자를 빼고 이름만 써야 한다. 그래서 사실 제사를 허용했다기보다는 토착화의 일환으로 조상 추도 의식 내지는 조상의 영혼을 위한 기도식을 제정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는 [[유교]]에서 조상 혼백의 개념이 일반적인 신앙의 대상과는 거리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유교]]에서 조상의 혼백은 숭배의 대상도 아니고 가문의 길흉화복과 전혀 무관하며, 단지 자식으로서 예를 갖추는 것 뿐이다. [[공자]]가 "[[괴력난신]]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고 못 박은 것도 이런 취지이다. 조상의 혼백이 길흉화복과 연관된다는 믿음은 도교와 민간 신앙이 뒤섞이면서 발생한 것이다. 물론 [[유교]]에서도 조상이 돌아가시더라도 예를 다해 잘 모시면 선한 행동이 보답받는다는 정도의 믿음은 있지만 그 정도는 타협 가능한 수준이고, 기복만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교]]에서도 대차게 비판받는다. 오로지 보상 정도로만. [[일본]]에서는 [[신사(신토)|신사]] 참배도 동일한 맥락으로 허용한다. 사실 조상을 추모하는 의식은 서양에서도 있다. 마을 어귀의 가족묘지에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정도의 추모 의식이 그것이다. 다만 묘지가 아니고 집에서, 묘비가 아니고 신위 앞에서, 묵념이 아니고 절을 하고, 저녁 음식이 아닌 제사상의 음식을 나눠 먹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 [[우상숭배]]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91년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윤지충 바오로]]의 공초에서 이러한 개념이 상충하면서도 대립하는 요상한 컬처 쇼크를 볼 수 있다. > 문초관 : 네 죄목은 신주를 불태운 것. 죽을 죄를 지었지? > 윤지충 : 천주학 역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무 쪼가리가 내 부모라고 가르쳤습니까?''' > 문초관 : 여기가 서양이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여기는 조선이다. > 윤지충 : '''조선에서도 5대째 되면 신주를 불태웁니다.''' > 문초관 : …4대까지가 성현이 정한 육신의 도리이다. > 윤지충 : 그거 누가 정한 것입니까?[* [[조선]]시대 유교 [[제사]]에서 5대째에 신주를 불태웠던 이유는, 유학자들이 영혼이 사후 120년(4대) 이후에는 자연스레 소멸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그리스도교]] 종파인 천주교는 신주를 우상숭배라 보고 영혼불멸을 믿기 때문에, [[성리학]] 사회에서 가치관이 양립하기가 힘들 수밖에. [[마테오 리치]] 신부를 비롯한 적응주의 선교와 보유론(천주교는 유교적인 문화관을 보충하는 종교로서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포교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제들도 [[한나라]] 시대 이전의 초기 [[유교]]를 긍정적으로 보았지, 성리학은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 문초관 : ……'''매우 쳐라!''' 그래서 [[아시아]]에서, 특히 [[한국]]에서 상당한 수의 [[순교자]]가 발생한 것도 영향이 있다. 지금의 [[가톨릭/대한민국|한국 천주교]]에서는 유교적 요소를 제외한 명절의 [[차례]] 역시 교회 공동체의 일로 승화시켰고, 심지어 설이나 추석 때 '''성당에서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특히 설날에는 합동 차례가 끝난 뒤 주임신부가 세뱃돈을 나눠 주기도. 본래 주임신부 개인 돈으로 나눠주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이렇듯 현대의 천주교는 지역문화에 대해서 굉장히 관용적이고 현지화도 상당한데, 이는 천주교의 지향점이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라도 믿을 수 있는 '''보편된(catholic) 교회''''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논란이 되는 작품인 [[다빈치 코드]]에 대해서도, 그저 픽션적인 작품이라는 단순한 결론만 내려두고 신경쓰지 않는다. [[금서]]라고 칭하거나 반박하는 일도 없다. 2009년에 [[교황청]]에서 [[찰스 로버트 다윈]]의 [[진화론]]에 대하여 인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미 1950년경에 교황 [[비오 12세]]가 "[[진화론]]은 인간의 발전에 유용한 과학적 접근"이라고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발언을 상기하면서, 이에 대해 [[창조론]]은 그에 발맞춰 다른 방향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교황청]] 부속기관인 로마 산타 크로체 대학의 신부이자 교수인 주세페 탄젤라 니티도 "4세기에 활동한 [[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책에서도 [[진화론]]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며 [[교황청]]의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진화는 가설 이상의 사실"이라고 밝히며 "[[진화론]]이 가톨릭의 교의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언급만 없다 뿐이지, 사실상 [[교황청]]은 [[진화론]]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주장만큼은 굽히지 않고 있는데, 이건 가톨릭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전반의 근본을 뒤흔들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대 가톨릭 교회는 [[진화론]] 등등 [[자연과학]]의 영역에 대하여 교회가 인정한다거나 불허한다거나 하는 식의 입장은 표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하던지간에 그건 신자 개개인의 생각에 맡기고, 다만 "진화론이 교회와 모순이 있는건 아니다"고 오해할 여지를 설명해줄 뿐이다. 쉽게 말해서 철학자가 자연과학에 대하여 인정을 하네 마네를 논할 자격이 없듯이, 성직자 역시도 그러하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영혼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도, 자연과학을 거슬러 주장을 했다기보다는 자연과학이 다루지 않는 영역에 대하여 종교적 믿음을 표현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가톨릭에는 '''[[수도회]]'''라는 독특한 문화가 존재한다. 특정한 구역에서 특정한 목표만을 추구하는 [[사제(성직자)|사제]]/[[수도자]]들의 모임을 일컫는다. 남자 수도자는 수사(修士), 여자 수도자는 수녀(修女)라고 하며, 수사들 중에는 [[성품성사]]를 받아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수도자인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성직수사, 수도사제, 수사신부 등으로 부름) 메이저 [[수도회]]는 [[가르멜회]], [[예수회]], [[아우구스티노회]], [[프란치스코회]], [[베네딕토회]], [[도미니코회]]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남자 수도회가 약 30여 곳, 여자 수도회가 약 130여 곳이 있다. 생각보다 매우 많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신부(성직자)|신부]]나 [[수녀]]는 교구 소속 신부이거나 교구에 파견된 수녀이며, 수도회 소속 신부/수사/수녀는 대외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이거나 특정한 목적의 외출이 아니면 수도회 밖으로 나오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보기가 힘들다. '''[[봉쇄]]수도원'''이라고 하여 '''평생'''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물론 괴롭히려는 것이 아닌, 그만큼 철저한 구도(求道)와 봉사를 한다는 뜻이므로 오해는 하지 않도록 하자. 수도회를 다룬 작품 중에서는 [[카르투시오회]]에 관한 내용을 담은《[[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8666|매우 추천할 만하다.]] 물론 진짜로 수도원 담벼락 안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과 신부들이 가지는 관계도, 개신교에서 신자들과 목사들이 가지는 관계와 다소 차이가 있다. 교리적으로 파고들면 개신교는 '교회의 권위란 적법한가?'에 대한 의문에서 분리된 종파이기에 '교회와 신자'라는 관계에 있어서는 가톨릭보다 신앙을 다소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부(목사)와 신자의 관계에서는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나는데, 오히려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이 관계를 덜 중시한다. 교구사제들은 몇 년마다 교구에서 다른 본당으로 뺑뺑이 돌리는 신세인 반면, 목사들은 자의로 이적하거나 숙청 당하지 않는 이상 해당 지역 신자들과 수십년씩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수도사제는 목사들처럼 몇십 년 동안 한 지역에 자리잡는 경우가 있으나,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마주치는 사제는 교구사제이다.] 또한 신자들이 교육을 받을 때도 가톨릭은 전세계가 동일한 교리를 공유하므로, 사제들이 가르치는 내용은 그 스타일에 차이점은 있을지언정 동일하다. 반면 개신교는 같은 교단 내에서도 목사들 개개인의 해석이 차이가 날 수 있고, 정말 심각하게 막 나가지 않는 이상 뭐라고 지적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서적 등을 통해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가톨릭 신자들은 일단 '가톨릭' 타이틀[* 가톨릭 관련 서적들은 원칙적으로 [[교황청]]/주교회의/개별 교구의 검열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런 검열을 통과한 책들은 imprimatur를 받게 되는데, 이런 책은 가톨릭 신자가 안심해도 좋다.]만 제대로 붙어있다면 상대적으로 안심하고 읽는 경향이 있는 반면,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이 배운 것과 다르지는 않는지, 혹시 문제 있는 목사의 서적은 아닌지 등등을 짚어가며 읽는 편이다. 때문에 가톨릭 신자의 경우 상대적으로 본당신부 이외에 정보를 취할 경로가 많으며, 본당신부와의 관계가 개신교 신자들이 목사와 가지는 관계와 차이가 있다. 비유하자면, 가톨릭의 신부는 초 거대 프랜차이즈에서 근무하는 언제든지 대체가능한 '직원'에 가깝고, 개신교의 목사는 어떤 특정한 협회에 소속된 '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교단에서의 대우나 신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당연히 차이가 나는 것. 때문에 가톨릭 내부에서도 신부들과 신자들의 관계가 (개신교에 비해) 너무 냉랭한 게 아닌가 하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물론 개신교 스타일에도 단점이 존재하는데, 목사들은 월급쟁이가 아니므로 자기 생계는 자기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게다가 먹여살려야 할 처자식도 있다. 때문에 돈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흑화]]에 취약하다. 게다가 개념 제대로 박힌 사람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목사 때려치우는 경우도 많다.] 가톨릭의 신부를 프랜차이즈의 가맹점 점주로, 개신교 목사를 자영업자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비유든 본질을 파악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지금도 유럽 가톨릭교회에는 우리나라 개신교처럼 한 번 소임지가 정해지면 평생 그곳에서 사목하고 있는데, 이것과 우리나라처럼 일정기간 사목 후 정기적으로 이동하는 경우 일장일단이 있고, 어떤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사제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는 일정한 간격이 필요한데, 이는 과거 성직자와 평신도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권위주의적인 사고가 아니라 사제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맺어진 관계가 되어야지, [[예수 그리스도]]는 배제된 채 사제와 신자 간의 인간적인 관계가 우선할 경우 위험할 수 있다. 또한 사제가 소수의 특정 신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면 공동체의 유지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앞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나라 사제들은 붙박이가 아니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동하기 때문에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개신교 예배당과 같을 수 없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개신교 예배당 분위기에 익숙한 시각에서 보면 사제와 신자들의 관계가 냉랭하다는 오판할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서로 다름의 문제이지, 비교의 문제는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