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체 (문단 편집) === 대수 === [[파일:external/pds.joins.com/201506172054770191_5581603685748.jpg]] [* 사진속 배우는 [[채시라]]. 해당 장면은 2015년 6월 17일에 열린 해비타드 여성 집짓기 건축기금 마련 패션쇼를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와 세자빈이 대례때 쓰던 가체로, [[병자호란]]으로 [[명나라]]와의 조공관계가 단절된 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새 왕과 왕비가 즉위할 때마다 명나라에서 하사한 적관(翟冠), 특히 친왕비(親王妃)의 '''칠적관(七翟冠)'''을 썼으나[* 참고로 황후의 관은 구봉관이다.] 명나라와의 조공관계를 끊고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면서 칠적관을 받아올 수도 없고 [[익선관]]과는 달리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도 못했기 때문.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국의 예제로 격상하면서 황후와 황태자비의 수식(首飾)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황후의 구봉관(九鳳冠)을 쓰는 것으로 <대한예전>에 명시하고 이를 삽화로도 남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대수를 얹었다. 구봉관 또한 칠적관처럼 복잡한 구조여서 직접 만들지 못했을뿐더러 명나라가 멸망한지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한족식 황실 의상을 만드는 기술이 많이 실전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청나라를 멸망시킨 [[위안스카이]]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의 황제로 즉위할 때 한족식 대례복을 입고 [[면류관]]을 썼는데, 이 때 대례복도 실제 한족 왕조 시절에 비하면 매우 어색했으며 면류관 또한 황제가 쓰지 않는 무류관이었다. 이 또한 청나라 치하에서 한족식 황실 의상을 만드는 기술이 실전된 탓이다.] 현대의 미디어매체나 행사에서처럼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턱밑에 끈을 묶어 고정하는 것이 아니며, [[http://folkency.nfm.go.kr/upload/img/20180821/20180821112630_w_.jpg|영친왕비의 적의 사진]]과 [[https://mobile.twitter.com/Oreaeui/status/981893476643102723/photo/1|이건의 부인 마츠다이라 요시코의 명복원삼 사진]], 그리고 [[https://mobile.twitter.com/Oreaeui/status/981893471739904000/photo/1|의친왕비의 명복원삼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머리 위에 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