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이텐 (문단 편집) == 운용 및 실적 == [[파일:external/www.pacificworlds.com/mssnwa1.jpg]] 1944년 9월 중순부터 가이텐은 서서히 그 숫자를 증가시켜 나갔지만 제일 큰 문제는 승조원을 뽑아 자살공격대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로서 앞서 설명한 '''승조원들의 사기진작이 헛소리였음이 입증되었다.'''[* 최소한 임무취소, 불시착 등으로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는 카미카제와 비교하면, 해치 닫고 모선과 분리하자마자 100% 사망 확정인 카이텐에 타기를 승조원들이 두려워함도 이해가 된다.] 10월 초부터 카이텐 탑재의 공사가 마무리된 제 15잠수대의 카이텐이 최종훈련을 마치자, 제6함대사령부는 겐(玄) 작전을 입안해 이 카이텐 공격대를 키쿠스이대(菊水隊)라 명명했다. 1944년 11월 캐롤라인 제도의 울리시 환초에서 [[미군]] 급유함인 USS 미시시네와를 격침시키며 요란하게 데뷔했다. 이후 미군이 항구의 경비를 강화하자 가이텐은 해상에서의 공격으로 전법을 바꾸고 키쿠스이대 이후 콘고대(金剛隊)ㆍ치하야대(千早隊)ㆍ진부대(神武隊)ㆍ타다라대(多々良隊)ㆍ텐부대(天武隊)ㆍ신부대(振武隊)ㆍ토도로키대(轟隊)ㆍ다몬대(多聞隊)라는 가이텐 부대를 창설하고, 해당 인원들이 패전 일주일 전까지 148기의 카이텐에 타고 출격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1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격침 3척([[호위구축함]]ㆍ급유함ㆍ상륙정 각 1척), [[대파(동음이의어)#s-3|대파]](大破) 1척(수송함 1척), [[소파#s-5]](小破) 4척(구축함ㆍ수송함 각 2척)에 그쳤다. 한마디로 말해서 개조한 비용도 제대로 못 뽑고 끝났다. 당장 일본에서의 추산도 해당 전과를 기록하면서 가이텐 106기의 대원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며, 종전 당시까지 가이텐의 대원들은 총 1,375명이었는데 정비 도중 사망한 자까지 합하면 총 사망자는 145명이라고 적었다. 그에 비해 미국에서 확인된 미군 사망자는 187명이라고 한다. 개조까지 해서 자폭무기를 운용한 것치고는 비참한 교환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서 설명했던 주옥같은 단점 외에도 가이텐을 싣고 출격할 잠수함도 부족했고, 그나마 출격한 잠수함도 가이텐을 출격시키기도 전에 들켜서 격침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가이텐이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위키페디아의 가이텐 항목에서는 가이텐의 역사를 서술하며 「일본 해군 입장에서 보자면 다몬대는 1척의 잠수함을 잃는 일도 없이 가이텐의 초진이었던 키쿠스이대를 뛰어넘는 전과를 이뤄, 가이텐 작전의 유종의 미를 장식할 수 있었으며, 미군도 전쟁 종결 전의 일본 해군의 커다란 성공이라고 평가했다.」라는 문장으로 마무리짓고 있다. 가이텐을 둘러싼 국뽕짓이 어찌나 심한지 이런 낭설의 출처를 파헤치는 [[https://www.amazon.co.jp/%E7%89%B9%E6%94%BB%E5%9B%9E%E5%A4%A9%E3%80%8C%E9%81%BA%E6%9B%B8%E3%80%8D%E3%81%AE%E8%AC%8E%E3%82%92%E8%BF%BD%E3%81%86-%E5%A4%A7%E6%A3%AE-%E8%B2%B4%E5%BC%98/dp/4886565263|서적]]까지 출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