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오강 (문단 편집) == 가오강은 반역을 꾀했는가? == 가오강 사건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가오강의 권력탈취음모 사건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 의견과 일치한다. 프레데릭 티비스(Frederick Teiwes) 교수도 마오쩌둥이 우월한 권위를 지닌 1인 우위체제에서 가오강이 류사오치를 대신해 후계자가 되려고 권력을 탈취하려 했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또다른 의견은 가오강과 소련과의 관계를 줌점으로 둔다.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사후 소련파인 가오강을 제거한 것이 가오강 사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의 회고록에서 기원하며, 이후 서구의 많은 연구들은 이러한 관점을 견지했다. 실제로 저우언라이는 1954년 2월 가오강 문제에 대한 좌담회 때 소련과의 관계 문제를 지적했으며 마오쩌둥도 가오강이 외국과 내통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지적은 일견 타당해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풀린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밀 문서를 연구한 학자들은 가오강 사건과 소련의 관계는 극히 부차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도 숙청 과정에서 외국과 내통했다는 혐의가 씌였지만 훗날 무고로 복권되었듯이, 외국과의 내통 문제는 정치적 숙청 과정에서 조작되거나 과장되어 관례적으로 부과된 것이었다. 가오강 사건은 당시 마오쩌둥의 권력이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사례다. 물론 마오쩌둥은 쭌이 회의에서 1인자로 등극한 뒤 [[정풍운동]]을 통해 명실상부한 공산당 주석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수많은 파벌들의 연합체여서 아무리 강대한 권력과 권위를 갖춘 마오쩌둥이라고 해도 이 권력구조의 변동은 쉽지 않았다. 특히 류사오치는 오랜 세월 자신과 함께 공산 혁명에 투신한 핵심 인사였고 따르는 무리가 가득해서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었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는 데 신중하고 모호한 태도로 대했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의도와 상반된 대안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때까지만 해도 [[류사오치]]가 자신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으며 [[저우언라이]] 역시 없어서는 안될 인재라며 높게 평가했다. 신민주주의 문제, 신세제 문제로 갈등을 빛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정책 집행 과정에서 견해 차가 생긴 것일 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두 사람을 제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가오강에게 [[류사오치]]의 과거를 조사하게 한 것은 [[류사오치]]를 견제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가오강이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배제하고 2인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었던 건 사실로 보인다. 그의 [[류사오치]] 비난 수위는 마오쩌둥의 기대를 지나치게 초월했다. 게다가 그는 린바오, [[펑더화이]], [[천윈]], 라오수스 등과 접촉해 함께 [[류사오치]]를 도모하자는 뜻을 밝혔으며 급기야 [[천윈]]에게 "부주석을 몇 명 두자. 당신이 하나를 하고 내가 하나를 하자."는 위험 발언을 하고 말았다. 결국 그는 마오쩌둥의 의중을 잘못 읽고 자신의 권력욕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내비치다가 자멸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