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오강 (문단 편집) === 라오수스 사건 === 1953년 11월, [[마오쩌둥]]은 가오강의 활동에 대해 전달받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다. 이때 가오강은 안즈원이 만든 정치국위원 명단 유포에 대해 "동지가 명단을 누설했소?"라는 마오쩌둥의 질문에 이실직고하지 않아 마오쩌둥의 의심을 사고 말았다. 그후 1953년 12월 15일, 마오쩌둥은 휴가기간 중 자신을 대신해 중앙의 업무를 처리할 책임자 문제를 논의했다. 마오쩌둥은 관례대로 [[류샤오치]]가 대신하도록 제안했지만, 가오강은 [[류사오치]]가 대리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으며 회의 후 [[천윈]]과 [[덩샤오핑]]을 방문해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특히 그는 [[천윈]]에게 "부주석을 몇 명 두자. 당신이 하나를 하고 내가 하나를 하자."고 말했다. [[천윈]]은 곧장 [[마오쩌둥]]을 찾아가 가오강이 자신에게 한 말을 알렸다. [[마오쩌둥]]은 가오강이 당과 국가의 영도권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폭로했다고 여기고 깊이 분노했다. 그는 12월 19일 [[덩샤오핑]], [[천윈]]과 대화를 나눈 후 [[천윈]]을 남방에 보내 가오강의 남방 여행에 대해 조사하고 남방의 지도자에게 가오강이 [[류사오치]]에게 반대하고 당을 분열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으니 그에게 속지 말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그는 [[천윈]]을 [[린뱌오]]에게 가서 그가 아직도 가오강을 지지하는 지를 알아오게 하면서 "린뱌오가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와 그는 나누어질 것이며 의견을 바꿔야만 그와 함께할 것이다."라고 [[린뱌오]]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이 말을 들은 [[린뱌오]]는 즉각 가오강을 더는 지지하지 않으며 [[마오쩌둥]]의 영도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2월 24일, [[마오쩌둥]]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가오강 문제를 폭로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베이징에는 두 개의 사령부가 있다. 하나는 나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령부로 광명정대한 것이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는 어둠의 활동을 하는 지하세력이다." 그리고 <당의 단결을 강화하는데 관한 결의>를 기초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 뒤, [[마오쩌둥]]은 항저우로 떠났고 류사오치가 대리를 맡아 일체의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후 [[마오쩌둥]]은 1954년 1월 7일 <결의> 초안을 검토한 후 [[류사오치]]와 중앙서기처에게 편지를 보내 결의안을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통과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가오강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1월 22일 [[류사오치]]에게 "누구든 자아비판하는 건 환영하지만 누구에 대한 비판은 가능한 피하고 과오를 범한 동지들이 깨닫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또한 1월 28일엔 [[양상쿤]]에게 "정면 비판을 견지하고 지난 과오를 경계삼아 잘못을 고쳐 사람을 구하는 것이 내 방침이다."라고 말하며 가오강을 숙청할 생각까지는 아니라는 것을 내비쳤다. 2월 6일~2월 10일, 중국 공산당 7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류사오치]]의 주재로 개최된 이 회의에서 가오강과 라오수스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뤘지만, 이들 뿐만 아니라 [[류사오치]], 보이보, 펑전 등도 자아비판했다. 그러나 가오강은 자신이 권력탈취 음모를 꾀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그리고 2월 중순 중앙서기처의 결정으로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37명 및 주요 업무 인원 40명이 참여한 가오강 문제 좌담회가 개최되었고 가오강은 이 좌담회에서도 자아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권력을 탈취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1954년 2월 17일, 가오강은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 의과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 자살시도는 그가 자신의 과오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죽음으로 당의 결정에 항거하고 당을 배반한 것으로 여겨져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가오강이 자살을 선택한 것은 진퇴양난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거리낌없이 털어놓은 대상인 [[천윈]]이 전날 좌담회에서 자신을 강하게 비판한 것에 깊은 배신감을 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중앙위원회는 가오강이 상하이정부 주석 라오수스와 공모했다고 판단해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1954년 4월 동북국에서 동북지구당 고급간부회의를 개최해 가오강의 추종자들의 반당 활동에 대한 폭로 활동을 전개했으며 그와 동시에 상하이 시, 당 대표회의 및 산둥성 당 대표대회를 개최해 라오수스와 그 추종자에 대한 비판 활동을 전개했다. 동북국의 장수산, 장민위원, 자오더쥔, 마홍, 궈펑, 천보춘 등이 가오강과 연좌되어 비판받았으며, 산둥분국 대리서기 샹밍이 라오수스의 추종자로 비판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