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오강 (문단 편집) === 동북왕 === [[파일:93b76d43f846015064c42d1b03670990_w.jpg]] 1952년 11월 7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마오쩌둥(왼쪽에서 첫번째)과 가오강(맨 오른쪽)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가오강은 중국공산당 동북국 제1서기 겸 동북인민정부 주석에 임명되었다. 그후 그가 다스리는 동북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동북 지역의 곡물 생산량은 1949년에 전년 대비 약 20% 증가했으며 연간 산업 생산액은 당초 계획보다 4.2% 늘었다. 또한 가오강은 [[6.25 전쟁]] 시기 한반도로 파견된 인민해방군에 대한 물자 지원을 착실하게 수행했으며 타 지역보다 먼저 증산절약운동을 실시해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국 관내 철도계통이 절약하여 국가 유동자금으로 헌납한 금액은 4조원 이상이었으며 철도국 역시 지난해 연말보다 1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절약했고 1040만 톤의 식량을 증산절약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가오강 동지가 1951년 12월 3일 공장, 광산 기업 작업장에서 전개한 증산절약운동에 관한 보고는 매우 훌륭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각지에 배부하여 참고해야 한다. (중략) 이런 경험은 중국의 모든 공장, 광산 기업에 유포해야 하며,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실행해야 한다." 또한 가오강은 증산절약운동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의 부정부패 문제가 불거지자 [[삼반오반운동]]을 전개해 부패 관료들을 모조리 감옥에 투옥시키거나 처형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당중앙 공식문건을 통해 동북 지역의 반부패운동을 본받아야 한다는 뜻을 밝히며 [[삼반오반운동]]을 전 중국에 시행하게 했다. 이렇듯 그는 동북 지역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고, 자연히 그의 위세는 극에 달해 사람들에게 '''동북왕(東北王)'''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이 남침 결심을 굳히고,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중국공산당 최고위 지도부 중에서 유일하게 적극적인 지원을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 [[주더]],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등이 내부정세와 미군 참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신중론을 견지했지만, 가오강은 북중우호와 "3주안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김일성의 호언장담을 근거로 참전을 지지했다고 한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656301.html|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 (17) 한국전쟁 (중)]] 1952년, 가오강은 중앙인민공화국 중앙 계획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고 1953년 베이징으로 향했다. 당시 그의 위세는 실로 대단해서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에 비견된다고 보는 이들이 많았다. 가오강 역시 그리 생각했고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마오쩌둥]]도 이들을 숙청하고 싶어한다고 여겼다. 가오강의 이러한 판단은 마오쩌둥이 1953년 6월 15일 정치국 회의에서 "신민주주의 사회질서 확립"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마오쩌둥은 정치국 회의의 연설에서 "신민주주의 사회질서 확립", "신문주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그리고 "사유재산 보호" 등 세 가지는 총노선에서 이탈한 우경적 관점이라며 비판했다. 이는 1951년 [[류사오치]]가 제기한 "현재로서는 중국 공산당이 신민주주의 제도를 공고화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관점이나 [[저우언라이]]가 1952년에 제기한 "중국 경제의 발전의 길은 신민주주의를 통해야만 사회주의로 갈 수 있다."는 관점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류사오치]]의 견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49년 4월 25일, [[류사오치]]는 텐진에서 "공산당 점령 이후 마비된 생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톈진의 자본가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직후 [[마오쩌둥]]은 톈진시 서기 황커청(黃克誠)에게 "주요 임무는 계급투쟁이며, 자본가 계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며 [[류사오치]]의 연설에 명시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류사오치]]는 신민주주의의 관점에 따라 동북 지역의 자본가 계급에 대한 억제 정책을 즉각적으로 자본가 계급을 소멸시키자는 좌경 민주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신세제(新稅制) 문제가 겹쳤다. 신세제는 기존의 합작사에 대한 우대를 취소하고 공유제 부문과 사유제 부문에 동일한 세금을 적용하는 것으로, 사영기업을 배려하고 국영기업과 합작사의 경영 개선을 촉진시키기 위해 보이보(薄一波)[* [[보시라이|보시라이(薄熙来)]]의 아버지이다.]의 주도로 추진된 세금제도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공사 일률 평등납세는 자본주의적 주장이며 세제 개혁에 대해 사전에 당 중앙에 보고하지 않은 건 문제다."라며 엄중하게 비판했고 보이보의 신세제를 승인한 [[저우언라이]] 역시 호되게 비판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1953년 무렵엔 외교에 관해서만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1953년 초 가오강에게 [[류사오치]]가 1929년 펑톈에서 국민당에게 체포된 상황에 대해 조사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리면서, 가오강은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를 제거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일단 [[저우언라이]]는 내버려두고 [[류사오치]]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먼저 자신과 오랜 친분을 유지했던 [[천윈]](陳雲)에게 마오쩌둥이 류사오치의 과거 행적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동북에서 오랬동안 같이 활동했던 [[린뱌오]]와 6.25 전쟁 지원 과정에서 긴말한 관게를 맺었던 [[펑더화이]]와도 접촉했으며 상하이의 라오수스(饶漱石)로부터 지지를 확보했다. 가오강은 1953년 6월 13일부터 8월 13일까지 개최된 재정공작회의에서 안즈원(安志文)이 기초한 중앙정치국 위원 명단을 유포해 [[류사오치]]를 비판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명단의 핵심은 "보이보는 포함되어 있는데 [[린뱌오]]는 없다."는 것이었다. 안즈원이 류사오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오강은 이 명단이 [[류사오치]]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함으로서 분파 활동을 전개하려 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가오강은 1953년 10월 3일부터 11월 2일까지 상하이, 항저우, 광저우 등 남방의 주요 도시를 여행하며 그곳의 지도자들과 만나 인사 문제와 당내의 세력 문제 등을 협의했다. 이때 소위 '군당론(軍黨論)'이 등장했다. 가오강은 혁명의 주류는 근거지인데 당의 역사에서 [[후난성]] 지역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평가되고 있으며, 7차 당대회의 인사에서 다른 지역과 군대의 인사들을 배려하기 위해 징강산 출신들이 배제되었다며, 8차 당대회에서는 분파를 고려하지 말고 실제 능력에 따라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의 주직이 "근거지와 군대의 당"과 "후난성의 당"으로 나뉘며 당은 군대가 만든 것이라는 '군당론'과 밀접히 관련된다. 또한 가오강은 당을 개조하여 "근거지와 군대의 당"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같은 주장이 제 무덤을 파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