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셔브룸 (문단 편집) === 가셔브룸 IV === 세계 17위봉. 등정난이도만 치면 K2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봉우리로서 특히 전설적인 서벽, 이른바 '빛나는 벽(Shining Wall)'은 수많은 뛰어난 클라이머들을 삼켰다. 아래 사진이 발토르 빙하에서 바라 본 서벽(West face), 즉 빛나는 벽의 모습이다. 이 벽이 빛나는 벽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오후 늦게 해가 질 때 석양이 비춰져 노란색으로 밝게 빛나기 때문이다. 카라코람 산맥에 있는 거봉들, 즉 가셔브룸 연봉이나 브로드피크, K2 베이스캠프에 가기 위해서는 발토르 빙하로 가야 하는데 베이스캠프에 가까이 가면 눈 앞에 가장 확연하게 보이는게 바로 이 산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qWpbVxOhM4|#]] [[파일:Gasherbrum_IV_route.jpg|width=800]] 1958년 리카르토 캐신이 이끄는 이탈리아 등반대 8명 이 북동쪽 능선으로 도전해서 그 중 월터 보나티와 카를로 마우리 2명이 초등에 성공하였다. 사진에서 빨간선이 북서마루(NorthWest Ridge)로서 1986년 그렉 차일드[* 1990년 K2의 가장 어려운 등반루트인 North Ridge를 두번째로, 그것도 알파인스타일로 등정한 사람이다. 이 사람 이후로 K2의 North Ridge 루트로 등정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톰 하기스, 팀 매카트니가 처음으로 등정한 루트이다. 이후 1999년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강연룡, 윤치원으로 구성된 한국등반대가 다시 올랐다. 자세한 등정기는 [[http://www.mountainkorea.com/contents_view.html?menuid=&submenuid=&contentsid=327|여기]]를 참고하시길. 사진에서 파란선이 폴란드의 전설적인 산악인 부르티에 쿠르티카와 오스트리아의 로버트 사우어가 1985년 알파인 스타일로 처음으로 서벽 등정에 성공한 루트이다.[* --하지만 굶주림과 추위, 심한 악천후 때문에 서벽 자체만 등정하고 정상에는 올라가지 않고 그대로 북서릉으로 하산했다.-- 이들은 서벽을 극복한 이후 정상까지 90m를 남겨 놓고 정상까지 가지 않고 그대로 하산했다고 한다. 정상까지는 평이한 설릉이었는데 그들이 정상까지 가지 않은 것은 서벽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업적이 더욱 높이 평가받는다. [[http://san.chosun.com/m/svc/article.html?contid=2020112401688|#]] ] [* 참고로 일반적인 등반은 공성전술 또는 공성등반이라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이 방법은 베이스캠프-캠프1-캠프2-캠프3-... 이런 식으로 정상까지 가는 동안 중간에 여러 개의 캠프를 차려 놓고 식량과 장비를 가져다 놓은 후 고소 적응을 위해 캠프들 사이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또는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면서 이루어진다. 돈이 많은 등반팀은 캠프들에 식량과 장비를 옮기는 데 셰르파들을 고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전문적으로 짐을 나르는 등반대원을 별도로 데리고 간다. 이에 비해 알파인스타일은 간단한 등반도구와 식량(길어야 3일분)만을 가지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등정을 시도한다. 당연히 일반적인 등반에 비해 알파인스타일이 훨씬 더 힘들다. 일반적인 등반에서는, 날씨가 허락하고 고소 적응만 된다면, 등정 루트를 잘 알고 있는 셰르파에게 앞장 서게 하고 셰르파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셰르파 꽁무니만 따라가도 정상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등산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순간의 상황 판단 조차도 셰르파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알파인스타일에서는 잘 알려진 루트조차도 매순간의 위험에 따라 목숨이 좌우되는 판단을 내려야 하며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보통 3일 내에 등정을 완료해야 한다.] 이들의 서벽 최초 등반은 현대 등반사에서 가장 용감하고 훌륭한 등반으로 평가받는다. 쿠르티카의 삶과 등반은 전기로도 출판되어 있으며 한국어로도 발매되었다.[* Art of Freedom, 히말라야 미니멀리즘의 개척자 부이테크 쿠르티카, 하루재클럽 [[http://san.chosun.com/m/svc/article.html?contid=2020112401688|#]]] 사진에서 노란선은 1997년 조성대 원정대장과 유학재 등반대장이 이끄는 한국팀이 중앙스퍼를 통하여 등정에 성공한 루트이다. 이들은 1995년에 북서마루 루트로 등정을 시도했으나 정상을 190m 정도 남겨둔 7,800m 지점에서 악천후로 인해 하산을 결정하는 바람에 실패했었다. 이들은 2년 후 1997년에 IMF라는 암울한 경제 상황, 그리고 눈사태로 베이스캠프에 있던 장비와 식량의 대부분이 사라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여 등정에 성공하였다. 이 등반으로 다른 나라 등반팀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도했던 사람들도 숱하게 실패했던 중앙스퍼 루트를 세계 최초로 개척하였다. 그에 따라 중앙스퍼 루트는 "코리안 다이렉트"[[http://publications.americanalpineclub.org/articles/13201213306/Korean-Direct|#]]로 명명되었으며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에 공식적으로 기재되었다. 그래서 이들의 등반은 한국 산악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이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nsarang3&logNo=60199827737&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감동적인 스토리]]는 책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로 출판되었고 2012년에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이들의 등반은 세계적으로 대단한 칭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내 분위기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까지도 정상에 올랐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등정주의가 만연한 풍토에서 정상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는 이유로 동료 산악인들 사이에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의심까지 받아야 했다. 거기에 개인의 사재까지 털어서 등반 비용을 조달했던 조성대 원정대장의 자금 유용 논란까지 있었다. 물론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등반을 한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 이러한 의심과 논란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후 이들의 등반가로서의 삶은 많이 위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