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사도 (문단 편집) ==== 평가 ==== 송 이종이 가사도가 서호에서 노는 것을 보고, 사암지[* [[사숭지]]의 아우이다.]에게 이를 훈계하라고 하였으나, 사암지는 이렇게 답하였다. >가사도가 비록 소년 시절 풍류의 기질은 있사오나, 그 재능은 국가를 위해 크게 쓰일 것이옵니다. 그리고 맹공과 쿠빌라이에게는 평가가 좋았다. 먼저 송사 <맹공전>에 의하면 맹공이 죽기 한 해 전인 1245년 연강제치부사, 지강주 겸 강서안무사 가사도가 회서 지역에 성을 축조해 공적이 현저하고 명성을 드날렸다. 이를 들은 맹공에 의해 추천을 받았다. 그 뒤 맹공은 가사도를 송 이종에게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사로 추천하였고 자기 수하인 [[이정지]]를 가사도에게 추천했다. 또한 1259년 벌어진 [[악주 전투]]에서는 가사도의 재능이 쿠빌라이에게도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가사도는 악주에 도착하여 악주성 주위에 목책을 하루 만에 건설했다.]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쓸 수 있겠는가? >저 성을 지키는 자가 오직 가 제치 하나이니, 너는 십만 군중을 다 이길 수 없고, 사람 수를 다 죽이면 달도 뽑을 수 없으니, 너희들 죄가 어찌 남의 죄가 되겠느냐! 왕부지는 가사도를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채경(북송)|채경]], [[진회]], 가사도, [[사미원]]이 간사한 것이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적국인 원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는데, 후일 [[염희헌]]이 1259년 악주 전투를 회상할 당시 쿠빌라이 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폐하께옵서 악주를 공격할 때, 신료들에게 "나는 어찌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장수로 얻어 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사옵니다. 또한 자신이 탄압했던 [[문천상]]에게도 [[악주 전투]] 당시 용맹을 떨쳤던 모습을 칭찬받았다고 한다. >그 악주 전투에서는 어찌 용맹하였고, 노항의 도주는 어찌 슬픈가!(己未鄂州之战何勇也,鲁港之遁何哀也!) 진의중이 가사도를 처형하라고 하자 사태후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사도는 삼조[* 송 이종과 송 도종, 송 공제]를 위해 부지런히 일했는데 어찌 일조의 죄로 대신을 대하는 예법을 잃으리오. 뒷날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에서 [[원나라]]로 항복한 무장들에게 "너희는 어찌 그리 쉽게 항복했느냐?"라고 묻자 이 무장들은 "가사도가 우리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가사도가 문인들을 중용하고, 저희들은 홀대하였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쿠빌라이 칸]]은 그들에게 "그래. 너희를 무시한 것은 가사도다. 송나라 황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너희는 송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구나. 가사도가 너희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라고 일침을 날렸다고 한다.[* 악주 전투에서 쿠빌라이에게 극찬받았던 것 덕분일 수도 있다. [[악주 전투]] 당시 가사도가 악주에서 쿠빌라이 군대를 모두 막아내었고, 쿠빌라이가 어떻게 하면 가사도 같은 자를 얻어 장수로 삼을 수 있겠느냐면서 가사도를 극찬하였다.] --하지만 그 가사도가 활개칠 수 있었던 것도 송나라 황제 덕분이었다-- 이처럼 맹공이 죽기 1년 전 가사도가 자신의 후임 경호제치사[* 형호 방어를 주관하는 사령관 직책]로 추천받았던 것과, 쿠빌라이에게 악주 전투에서 그 재능을 칭찬받았던 것, 염희헌의 [[악주 전투]] 회상, 쿠빌라이가 가사도 때문에 투항했다고 하였던 남송 항장들에게 오히려 가사도를 치켜세웠던 것은 가사도가 선인은 아닐지라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