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락국기 (문단 편집) == 설명 == >文廟朝 大康年間 金官知州事文人所撰也 今略而載之 >[[문종(고려)|문종]] 때인 대강(大康) 연간[* 1075년 ~ 1084년, 가락국 멸망 후 약 500여 년 후]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 문인[* '문인이었던 금관지주사'가 쓴 것이냐, 아니면 '금관지주사에 속해있던 어느 문인'이냐, 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석은 후자.][* 이 문인의 정체도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숭선전신도비문(崇善殿神道碑文)』에 따르면 [[고려 문종]]대에 [[금산군|지금주]]사(知金州事)를 지냈던 김양일(金良鎰)이 [[수로왕릉]]을 보수하러 왔고, 그와 관련된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와는데, 이를 근거로 김양일이 지은 것이 아니냐 설이 있으나 주류는 아니다.]이 지은 것이다. 지금 간략히 하여 그것을 싣는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 각주 《삼국유사》 에서 인용된 [[가야]]의 [[사서]]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락국기에 있는 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오고, 그 후대의 [[왕]]은 이름과 재위시기만 옮겨놓은 다음 생략하는 식으로 처리해버려서 사실상 실전되었다.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 내용이 손실된 것도 문제지만, 남아있는 부분을 따져도 [[사료(역사)|역사]]로서의 사실(史實) 정확성이 확실히 담보되진 않는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 왜냐하면 일연이 요약해서 실은 이 내용이 가락국기에서 전하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설화를 그대로 가져온 것인지, 혹은 신이하고 불교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일연이 취사선택해서 실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으며, 책 원문이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책을 편찬한 배경이나 가락국기가 인용한 문헌 등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 그래서인지 실제 [[백제삼서]], [[일본세기]]를 인용해 제작된 [[일본서기]]나 기록이 아닌 [[고고학]]으로 보는 가야의 모습과 상충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가뜩이나 남은 게 없는 가야의 역사인지라, 가야의 초기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료다. 그나마 《[[삼국사기]]》보다는 가야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