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득염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92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 후 2006년까지 꾸준히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07년 [[SK 와이번스]]에 이적하여 2010년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데뷔 후 2년차까지만 해도 거의 패전처리 수준이었으나 1993 시즌을 마치고 하와이 윈터 리그에 다녀온 후 기량이 한 단계 스텝업하여 1994년은 무려 162이닝을 던지며 풀 타임 선발 투수로 활약했고, 1995년은 선발 중간 마무리 등 보직을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롯데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1994년 압도적으로 1위를 치닫고 있던 LG와의 잠실 원정경기에서 [[정삼흠]]과 맞대결하며 8회까지 0:0이라는 투수전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 백미. 해당 경기는 연장 접전 끝에 롯데가 승리했지만 가득염은 아쉽게 ND로 기록되었다. 1996년부터는 성적이 그리 신통한 편이 아니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거의 1이닝씩 중간계투로 등판하여 짧게 던지는 투구 위주라 통산 성적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부분이 없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롯데에서 활약하며 좌타자 전문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개념을 [[KBO 리그]]에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통찮은 성적 탓에 팬들이 붙여준 별명은 가득炎. [[강상수]]와 함께 롯데 불펜진에서 '''불꽃을 던지는 남자''' 취급을 받았다.[* 사실 이름의 끝 글자도 바로 '''불꽃 염([[焰]])'''이다. 거기에다가 가운데 글자인 '득'자는 '''얻을 득([[得]])'''..--[[방화범(야구)|방화범]] [[득템]]--] 2006년 시즌 이후 계속 선수 생활을 하고 싶어했지만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선수로는 받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코치직을 제안했다. 하지만 가득염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SK 와이번스]]에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코치직을 제안한 [[롯데 자이언츠]]에는 은퇴한 후 2011년에 2군 투수/재활코치로 돌아오게 되었다.] 2007시즌부터는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SK와이번스로 이적하게 되었는데, 베테랑 좌완 불펜투수라는 점이 베테랑을 좋아하고 불펜야구, 좌우놀이를 즐겨하는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에 꼭 들어맞아 좌완 원포인트로 중용되었는데, 좌완 원포인트라는 보직이 위기상황에 등판하는 특성상 위기에도 겁먹지 않는 강한 멘탈과 노련함이 중시되는 역할인지라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 가득염에게는 딱 어울리는 자리였고, 덕분에 2006년에 비해 등판횟수가 대폭 늘어나고 방어율은 내려가며 선수생활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었다. 2007시즌 동안 쏠쏠하게 좌타자 상대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였고[* 이 때 [[지명타자/소멸사례]]에도 나오지만, [[조웅천]]이 한 타자 잡은 후에 좌타자가 나오는데 그 뒤의 타자들까지 조웅천이 던지게 하기 위해서 '''조웅천을 잠깐 좌익수에 보내고 그 사이에 가득염이 등판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시리즈에서 '''6차전 모두''' 출장했고 코나미컵에서 [[중국]]전을 빼고 전부 출장하여 17타수 1피안타라는 기록을 세운 걸 보면 사람의 동기부여와 분위기 쇄신의 위력을 알 수 있다. 08년에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좌완 원포인트로 중용되어 SK 벌떼불펜의 일원으로 2연패에 공헌했고, 09년부터는 역시 40세라는 많은 나이를 이길 수 없어 성적이 떨어졌고, 2010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현역 선수 시절에는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선수도 아니었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무척이나 운이 좋은 선수이기도 했다. 한 구단에서 14년 동안 뛰면서 험난하게 선수 생활을 이어 왔지만, 데뷔 시즌인 1992년에 롯데에서 우승을 맛보고 이적 후 SK에서 2시즌 연속으로 우승을 맛봤다는 점에서는 어떻게 보면 참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는 선수 시절을 보냈다. 한마디로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이어온 표본으로 꼽히는 선수. 전 [[한화 이글스]] 외야수 [[제이 데이비스]]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투수로 가득염을 꼽았다고 한다. 600경기 출전 당시 본인 스스로 40세까지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었다. 비록 [[롯데 자이언츠]]에서 뛰지는 못했지만, [[SK 와이번스]]에서 40세까지 야구 선수 커리어를 이어 나갔으며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SK 현역 시절이었던 2007년 8월 30일 현대전에 등판하여 [[조웅천]]에 이어서 [[KBO 리그]]에서는 두 번째로 프로 통산 7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https://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28&aid=0000211159|38살 가득염 700경기 등판, 16년 쌓은 ‘노장의 공든탑’]] KBO 등록 선수 중에서 [[최동원]]과 [[윤근영]]과 함께 역대 최고 타율인 [[10할 타자|10할]]을 기록하였다. 2008년 5월 27일 KIA전에서 [[유동훈]]을 상대로 안타를 기록한 것이 유일한 타격 기록이다. (1타수 1안타). [[파일:attachment/가득염/15.gif]] 바로 이 장면.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39세 29일)이기도 하다. [[송진우(야구)|송진우]]의 은퇴로 2010년 등록선수 중 [[구대성]]과 함께 최고령 선수가 되었으며, 2010 시즌을 마친 후 구단과 [[김성근]]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현역 은퇴를 발표하며 19년에 걸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은퇴에 따라 2011년 [[한국프로야구]] 최고령 선수 타이틀은 1970년 8월 생인 [[이종범]]에게 넘어갔다. 통산 성적은 800경기(프로 통산 3번째) 출장, 36승 49패 78홀드, 방어율 4.57. 프로 마지막 경기에 800경기 출장 기록을 달성했지만, 언론과 중계진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허구연]]이 800게임 출전이라고 말하긴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